대학원에 들어갔다. 어쩌다가 그런 짓을 했을까. 사실은 돈이 없어서 졸업하고서 바로 취업을 했어야 하는 게 맞았는데 돈도 없으면서 대학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다행히 학과에서는 BK21+사업을 하고 있어서 석사과정생은 월 60만 원의 장학금을, 박사과정생은 월 100만 원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월 60만 원으로 생활비며 답사 다닐 때 드는 비용, 교재비를 감당해야 했다. 물론 식비도 술값도 나갔다.
들뜨는 새 학기, 거기다 새내기 대학원생이라니. 나는 전공을 사랑하는 나에 취해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 어느 부분 정도는 취해야 살아갈 맛이 나지 않는가. 박물관에서 일하려면 석사는 해야 하더라는 카더라에 속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는 맞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석사 학위를 가졌으니까. 석사학위가 뭐람 박사학위도 가졌지, 유학 다녀온 사람도 있지. 나는 그곳에 어떻게든 비집어 들어가 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혜정과 나는 학부 선후배 사이로, 대학원에 들어와서 더 친해진 케이스이다. 혜정이 없었다면 나는 대학원생활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었을까? 내 가뭄 같은 대학원 생활의 단비 같은 존재가 혜정이었다. 나는 그런 혜정을 두고 3학기를 마치고서 대학원을 떠나왔다.
혜정과 나는 자타공인 만만이였다. 학부에서부터 봐온 교수님들을 대학원에서도 본다는 것은 친근한 저주다. 나와 맞는 교수님이라면 잘 맞겠지만 아니라면 그저 지옥이다. 나는 그런 경험을 몇 했고 어느 면으로는 강단이 있었지만 어떤 면으로는 유약했던 나는 그런 경험들을 못 견뎌했다. 못 견디면 어쩔 거냐고? 도망쳤다. 학부에서 바로 대학원으로 올라온 사람이 아니라 타대학에서 대학원에 입학한 사람들, 또는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은 교수님들이 만만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와 혜정을 비롯한 동기들은 달랐다. 오랜 기간 봐왔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와 혜정은 혼날 때는 대표로 혼났으며, 발표를 시키거나 할 때도 대표로 지목되었다. 정말 만만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 동기들은 똘끼 충만했던지라 교수님께서 대학원은 회사 같은 곳이라서 빠지면 안 된다고 혼내자 다음 수업부터는 번갈아가면서 수업에 빠졌다. 서로 빠지겠다고 연락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다.
대학원 수업은 대체로 교수님께서 지정한 논문을 읽고 논평문이나 질의문을 만들어 발표하거나, 논문 하나를 PPT로 만들어 발표해야 했다. 매 학기 3과목의 수업을 듣는데 각 수업마다 매주 논문을 읽어야 하고 발표 차례가 돌아오면 발표 준비를 해야 하고, BK21+사업에서 하는 연구조사도 해야 했다. 다행인 점은 대학원에 중간고사, 기말고사 같은 시험은 없었고 학기가 끝나면 2학기 수료 후에는 어학 시험을, 3학기 수료 후에는 전공 시험을 별도로 쳐야 했다. 나는 전공 시험은 치지 못했다.
이런 대학원 생활을 보내면서 나와 혜정은 교수님들에게 얼마나 혼났는지 모를 정도로 혼이 났다. “오늘도 또 혼났어…. 속상해….”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깔깔대며 학교 주변의 카페에 가서 대화를 하거나 혜정이나 우리 집에 와서 놀다가 헤어지는 것도 일상이었다. 불안 속의 안온한 일상.
방학은 언제 오는가? 방학은 기말리포트를 제출하고 나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보통은 기말리포트 초안이나 계획서를 발표하고 수업을 일찍 종강하고서 기말리포트를 제출하면 방학이 온다. 그런데 또 우리의 동기들은 일을 해냈다. 기말리포트의 수준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교수님은 급하게 수업을 재개했고, 다시 발표하라고 하셨다. 난감했다 나는 마감 때는 분명 A라는 주제로 냈다가, 발표할 때는 이게 아닌 것 같아서 급하게 B로 고쳐서 갔더니 교수님께서 기가 막혀하셨다. 기가 막히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내게 지쳐갔다.
그렇게 두 학기를 보내고서 낡고 지친 대학원생이 된 혜정과 나는 어김없이 ‘공부방’이라고 부르는 연구실에 있었다. 당시 나는 다른 사업의 민속지 작성도 맡고 있었는데 일생의례와 종교생활 두 꼭지를 맡아서 해야 했기에 다른 석사과정생들보다 개인 시간이 없었다… 고 하면 핑계일까. 주말에는 답사를 나가 조사를 하고 돌아와 자료를 정리하고 글을 쓰고, 평일에도 공강 시간 대가 나오면 답사를 나가야 했다. 마을은 학교와도 꽤 먼 거리에 있고, 버스 배차간격도 길어서 이동시간만 편도로 1시간은 넘게 걸린 것 같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고, 조사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에, 매주 해야 하는 것들은 닥쳐오고 너무 힘들었다.
평일에는 거의 연구실 밖으로 못 나갔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서 씻고 다시 들어와서 다시 글을 쓰거나 논문을 읽거나 대학원생이 해야 하는 일들을 해야 했으니까. 이런 날들을 보낸 나와 혜정은 지쳐만 갔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우리끼리는 ‘크리스마스 지진 사건’이라고 부르는 일이 있다. 크리스마스 때 어김없이 연구실에 있던 나와 혜정은 잠깐 쉬려고 원형 탁자 주변에 둘러앉았다. 탁자 위에 있던 물병 안의 물이 흔들렸다. 우리도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강, 지진 났어.” 혜정이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힘 없이 내가 말했다. 우리는 피신을 갈 생각도 못한 채로 가만히 흔들리는 물병을 쳐다봤다. 우리만 가만히 있고 세상은 움직이는 듯했다. 재난 상황인데도 왜 움직이지 않았을까. 너무 지친 나머지 사고가 멈춘 걸까. 지진이 멈추고서 미적미적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징하다 우리, 왜 바로 안 나갔을까”, “그러게.”하면서 서로 어이없어 웃었던 기억이 난다.
공부방 지박령이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학원 새내기로 입학해서 얼마 안이 따가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부터 계속 그랬을 것이다. 흔히 공부방이라고 부르는 연구실은 석사과정생들이 모여있는 곳, 또는 박사과정생들이 모여있는 곳을 말한다. 그냥 연구실이라고 하면 교수님의 연구실을 말하는데 이곳도 지박령은 있다. 흔한 건 아니지만 애착인형 같은 제자를 연구실에 들이고 공부를 하게 시키신다. 멋도 모르는 학부생 때는 좀 부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끔찍하다. 공부방 지박령이 훨씬 낫겠다.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면 상황이 좀 더 나아졌을까, 내가 다른 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까? 아침에 출근하듯 공부방에 얼굴을 비추고 수업에 들어갔다가 저녁이면 집에 가는 언니들은 졸업을 했다. 졸업할 만한 성실함이었다. 나는 프로젝트를 안 했어도 성실했을까? 수많은 물음이 나를 덮쳐오지만 내겐 그때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잘할 자신은 없다. 시간이 부족한 나는 논평문이나 발표준비를 새벽에서야 시작했고, 연구실에서 수업 전까지 작업을 하다가 제출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점심을 급하게 먹고 다시 공부방으로 들어와 수업준비를 하고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잠깐 카페를 가거나 공부방에서 동기들, 선배들과 떠들어댔다. 그래도 종종 카페도 가고 대학가에 있는 수제맥주집도 갔다. 저녁이면 다시 채록을 하고, 논문을 읽다가 눈물이 좀 났다.
나는 이때 우울증이었다. 지금은 양극성 정동장애, 즉 조울증으로 증상이 변하긴 했지만. 당시에 인지장애가 심해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논문을 한 바가지 읽어야 하는 대학원생인데 이런 상태라니. 절망스러웠다. 언제 마음 편하게 쉬었더라? 언제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했더라? 내가… 내가…. 빛났던 순간이 언제더라? 우울증은 나를 좀먹어갔다. 문장과 문장을 잇지 못하고, 문맥을 해석하지 못하게 된 내가 제대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도 없을뿐더러, 수업도 따라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허리디스크가 발병해서 도저히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돈도 필요했다. 결국 나는 휴학을 선택하고 치료를 하며 취업 준비를 했다.
동기들은 대체로 졸업을 했는데 나 혼자서 그 어렵다는 '척척석사과정휴학생'이다. 언제 다시 연구실 지박령으로 돌아가게 될까. 쓸데없이 전공에 미련이 남아서 자리를 맴돈다. 주변에서는 로또가 되면 나를 대학원에 보내주겠다는 무서운 소리를 해댄다. 아주 고맙다. 나 역시 사실은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