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던 단어였다.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을 했던 초등학생 때를 지나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때 까지도. 나는 이 가난을 내게서 어떻게 떼어내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가난은 늘 나와 함께 했으므로, 여느 자기 계발서처럼 이걸 극복해야 한다거나 어떻게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랬다면 사실 대학원도 가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 후회해서 어쩌겠는가.
엄마가 돌아가셨던 중학생 시절, 보험을 하던 친척이 본인 돈으로 초반에 보험을 넣어줬다고 엄마의 보험료를 가지고 가고, 나는 일부를 받았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내가 받은 보험료는 300만 원 정도 됐던 것 같다. 엄마의 목숨값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어린 내가 친척들의 기싸움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원래 내 몫으로 나와야 했을 엄마의 보험료의 총액을 나는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서 교통비나 옷 구입비, 기숙사비 등 등 돈 나갈 곳이 많아지게 되자 돈은 후루룩 사라지게 되었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내게 본인이 죽으면 친척에게 가서 의지하라고 했다. 자신의 자매니까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런데 내가 의지할 만한 곳은 친척들이 아닌 중학교 때 알게 된 여자 선배였다.
엄마가 남긴 말도 있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던 내게 그 친척은 내 앞으로 들어놓은 보험으로 담보대출을 받아 본인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 나는 당시에 담당 사회복지공무원이 기초수급생활자 수급비를 어떻게든 깎겠다고 혈안이 돼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내가 수급비가 깎일만한 거리를 제공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건 어렵겠다고 다시 연락을 남겨놨었다. 당시 나는 학과 사무실에서 근로장학생을 하고 있었고, 일을 하는 동안에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놨다. 교수님들이 과사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방문하시기도 했고, 학과 사람들도 찾아오고, 심부름도 다녀야 했고, 내가 기억하기로 그날은 취업자 조사를 한다고 졸업생들에게 전화를 돌리던 날이었다. 휴대폰을 다시 확인하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며 문자며, 음성사서함에 음성을 남겨놓았다. “너 이렇게 사람 살살 약 올릴래? 내가 어떤 상황인 줄 아나?”하면서 마치 빚독촉하듯이 굴었다. 피가 식었다. 다시 연락을 해서 내가 친척에게 빚을 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럼 보험을 해지하고서 돈을 넘기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인연을 끊었다. 물론 담당 사회복지공무원에게도 해명을 해야 했다. 다행히 수급비는 끊기지 않았다.
잠깐 그 친척집에 있던 내가 구남자 친구를 사귀던 때 지역으로 갑작스럽게 놀러 온 남자친구의 방문에 난감해하다가 보러 다녀오겠다고 했다. 저녁 무렵이라 갈 데가 없어서 주변의 카페에 갔다가 숯가마에 가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무음모드로 하고 확인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 친척은 내게 수십 통의 전화를 했고, 친척집으로 돌아가자 “니가 혼자 살면서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알겠다”라며 계속해서 폭언을 퍼부었다. 언니들은 말이 없었다. 마치 내가 몸을 팔고 오기라고 한 듯이 굴었는데, 치욕스럽고 화가 났다. 늦게 들어왔기로서니 이런 취급을 당한다고? 그때 화라도 내고 나왔어야 했다고 지금에서는 생각한다. 살찐 나의 몸을 자신의 마른 몸과 비교하며 “쟤 허벅지가 내 허리 만하더라”하고 계속 살 빼라고 하는 친척이었다. 그래, 그때 끊었어야 했다.
해가 지나고 여전히 나는 학과 사무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었다. 조교로 일하던 선배가 전화를 받으며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그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내 친척이라고 전화가 왔는데 내 번호를 알 수 있겠냐며, 바뀐 휴대폰 번호를 말하며 이 번호가 맞냐고 묻더란다. 친척들은 이미 내 바뀐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었는데도 연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폰으로 문자가 왔다. 전화 좀 하자며. 알고 보니 문중의 땅에서 보상비가 나온다고 해서 나를 부른 것이었다. 엄마의 지분이 있는데, 엄마가 죽자 그 상속자인 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동의를 하지 않으면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에 동의를 하러 가겠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큰집에 가자 다른 친척들은 없었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큰집 친척들과 함께 저녁도 함께 했다. 거기서도 기죽지 않으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민속학과에서 낯선 사람들 집에도 가서 원하는 걸 물어보고 조사하러 다녔는데, 친척이라고 못할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서 받은 돈은 십만 원 남짓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도 역시 친척들에게는 연락이 없고, 나 역시 연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까워야 할 친척은 친척이라기보다 친했지만 척진 사람에 가까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친척을 제외한 사람들과 가까워져 방학이면 언니네 집에 갔고, 내게 비빌언덕이 필요하다고, 돌아올 곳이 필요하다고 아줌마는 내가 고등학생 때 살던 방을 내내 남겨두고 청소해 놓으셨다. 비빌언덕. 생각도 않고 살던 단어였다. 내겐 엄마조차도 비빌언덕이 아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비빌언덕이 되어준 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차라리 내 방을 정리했다면 언니네 동생들이, 언니네 가족들이 좀 더 편하게 살았을 텐데. 아줌마가 돌아가시고, 그 집을 정리할 때까지도 내 방은 남아있었다.
가난은 내게 진덕 하게 붙어있어서, 제일 가난하게 살 때는 당연히 돈을 벌 수 없던 고등학생 때였다. 학교 점심비, 석식비가 부담스러워 어느 때는 급식 신청을 취소하고 도시락을 싸다녔다. 주말이면 언니네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때는 혼자 밥을 차려 먹거나, 2층에 사는 이웃 이모가 하는 포장마차에 가서 붕어빵이나 오뎅으로 끼니를 때웠다. 너무 배고플 때는 연합동아리를 하던 곳에 2시간 여를 걸어가서 선생님들께 밥을 사달라고 하기도 했다. 친구네 어머님들이 반찬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종종 굶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돈에서 아낄 수 있는 건 식비와 교통비 정도였다. 등하교할 때 타는 버스비가 아까워서 하교할 때는 걸어 다녔다. 겨울이면 발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고, 발톱에 멍이 들기도 했다. 이런 것쯤은 괜찮았다. 곤란했던 건 돈이 떨어졌는데 생리대를 사야 했을 때였다. 다행히 주말이던 때 기초생활수급비 입금날이 며칠 남았고, 쓸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었다. 생리대를 살 수 없어서 휴지를 둘둘 말아서 막기도 했지만 일시적이었다. 휴지도 돈이라 (그러면 안 되지만) 인근 화장실에 가서 휴지를 말아와서 생리대 대용으로 썼다. 아니면 계속 속옷과 바지 손빨래를 하거나. 며칠이 지나고 다행히 수급비가 들어와 생리대를 사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그때는 아줌마에게 손을 벌려야 했겠지만.
가깝지만 또 아줌마 아저씨에게 배고프다고,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집에서 살고 있기까지 한데도 옷을 사달라거나, 무언가를 해달라고 하는 종류의 일은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뒤늦게 나 이렇게 살았었다고 언니에게 말했을 때, 언니가 놀라고 슬퍼할 걸 알았다면 진작 말할 걸 그랬다.
대학생이 돼서는 큰돈이 필요했다. 기숙사에서 살 때는 기숙사비나 식비가 많이 들어서 어느 순간에는 자취를 하려고 했다. 자취를 시작하면 돈이 더 많이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과제를 하거나 술을 마신다고 밤새는 때가 많았어서 자취를 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학교 주변은 보증금에 월세를 내기보다는 한 해의 월세를 한 번에 내는 사글세 형태로 운영하는 원룸이 많았다. 자퇴하는 동기의 방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반년 치 월세를 나눠서 주는 걸로 자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학교 생활을 하는 데는 생활비도 들고, 답사를 다닐 때도 돈이 들고, 친구들과 놀 때도 돈이 들었다. 룸메이트를 구해서 살았던 때도 있었는데 룸메였던 동기의 노트북을 몇 번 빌려서 쓰자 룸메가 내 애인에게 “걔는 왜 노트북 안 사?”라고 물었다고 전해 들었다. 내 사정을 아는데도 저렇게 말할 수가 있구나 하고 새삼 놀랐다. 나는 그 후에 애인의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고서 동거를 하게 되었고, 애인의 부모님께서 집세를 마련해 주셨다. 마음마저 가난해지는 날이면 아직까지도 나는 빌붙어서 사는구나 하고 느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내가 가난하다고 느꼈을 때는 노트북 하나 없을 때였다. 노트북은 너무도 비쌌고, 고등학생 때 아저씨가 마련해 준 컴퓨터는 너무 늙었다. 비교를 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안다. 노트북이 있었다면, 좋은 사양의 데스크톱이 있었다면, 차가 있었다면, 집을 빌릴 돈이 있었다면. 돈이 있었다면으로 귀결되는 이 후회와 물음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대학원을 가지 않았다면 조금 더 나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민속이라는 학문을 좋아했던 나는 돈을 버는 대신 대학원에 진학했다. 학과에서 나오는 연구장학금이 나와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애인을 비롯한 친구들이 대학원을 가니 당연히 나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돈을 벌다가 대학원에 입학할 걸 그랬다. 대학원을 다니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는데, 답사를 갈 때마다, 연구를 할 때마다 나는 가난했고 낡아져 갔다.
여느 대학원생과 마찬가지로 내게 조금이라도 더 재능이 있고 더 똑똑했더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다. 남들과의 상대적인 비교와 나와의 절대적인 비교 그리고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내게 떨어지는 미움들이 나를 괴롭혔다. 답사를 갈 때도 돈이 필요했다. 자차가 없으니 머나먼 시골 마을을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고, 겨우 마련한 저렴한 노트북은 문서 작업을 할 때조차 버벅거려서 화나게 했다. 돈이 조금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계속 생각한다. 사실 건강 때문도 있지만 돈 때문에 휴학을 결정했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렇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지만 계약직으로 전전하며 최저임금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직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신입이었으니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신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속 일을 했는데도 신입이라니 아이러니하다.
나는 사실 중학생 때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치료를 할 생각을 못했다가 대학원생 때 이렇게는 살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병원을 찾았다. 지금은 증상이 변화해서 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데 돈이 있었다면 진작에 받았을 것이다. 궁지에 몰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테다.
가난하다고 하면 ‘돈이 없는데 그걸 해?’, ‘돈이 없는데 그걸 사?’, ‘어떻게?’하는 자기 검열과 주변의 검열이 들어온다. 나 역시 이것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 기저에는 ‘감히’라는 생각이 들어있는 건 아닐까. 어떻게 ‘감히’ 가난한 사람이 그걸 할 수 있지? 그걸 가난하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지독한 물음말이다. 지금의 나는 돈은 없지만 가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기초수급생활자에서는 벗어났으니까. 가난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