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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강 Sep 02. 2024

누가 누구의 인생을 망쳤다고

작은 검은색 피아노 밑에 맥주병이 아무렇게나 깨져있다. 옆쪽 탁상 위에 홀케이크를 보면 누군가의 생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기쁜 날을 불행한 날로 기억할 당사자가 누군지는 모른다. 이복언니가 쓰레받기로 맥주병 조각을 치우려고 하고, “치우지 마!” 누군가는 목청껏 고함을 지른다. 누군가는 나의 아비다. 아직 어린 이복오빠는 그 옆에서 쭈뼛쭈뼛 서있다. 이런 말들을 알아듣는 정도면 그래도 나는 유치원생 언저리는 되지 않았을까. 나는 깨진 맥주병처럼 아무렇게나 자랐다. 


가장 오래된 기억이 이런 것이라니, 유년기 때는 한참을 기가 막혀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빚보증을 서고 집을 말아먹어서 아비가 알코올중독이 생기고 패악질을 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원래부터 그런 기질이 있던 사람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모 대기업에 일하던 아비는 돈벌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고, 우리 집은 자가에 자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계모임을 따라 놀러 다니거나 엄마가 금은방을 다니면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의 즐거운 기억들은 사진 속에 남아있다. 나의 기억의 편린 속에는 지금의 나를 해칠 수는 없는 이런 기억들이 많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내가 등 돌린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나의’를 붙이기도 싫은 아비, 친척들, 이미 기억 속에서는 사라진 누군가들.  


엄마와 나는 사이가 좋으면서도 좋지 않았다. 엄마와 나의 성격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도 나는 엄마의 기세를 닮았고 그래서 더 삐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는 나와 40살이나 나이 차가 났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늙어있었고, 엄마는 늘 그 점을 아쉬워했다. “내가 아가씨 때 모습을 너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하면서. 엄마의 젊은 모습은 사진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다. 우리 집에는 유독 사진이 많았는데, 특히나 폴라로이드 사진이 많았다. 이사를 하면서 사진을 버리고, 필요 없는 사진을 버렸다. 쓸데없이 많기만 한 사진은 세상에 홀로 남은 내게 필요가 없었다. 특히 나와 관계도 없는 사람의 사진은 더더욱.


지금 와서 문득 떠올렸을 때 소름이 끼친 것이 있는데, 바로 내게 모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는 점이다. 오래전부터 사진을 버리면서 잃어버린 것은 아니냐고? 결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어렸을 적부터 그런 사진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부는 어쩐 일인지 결혼할 때도 사이가 안 좋았으며, 엄마는 내게 종종 “네가 없었다면 결혼 안 했을 거다”라고 말했다. 나를 지우겠다는 말이 아니라 아비 없는 아이로 키우기 싫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결혼사진조차 없고, 모부가 함께 찍은 사진 자체도 없다. 정말 단 한 장도. 그걸 깨닫지 못하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은 점도 놀랍다.


원래도 나이가 많았던 엄마는 부정맥을 앓고 있는 상태에서 소위 노가다라고 불리는 업을 뛰었다. 젊었을 적에는 버스 안내양을 했다고 들었다. 엄마가 일한 곳에서는 저녁으로 식권이 나왔는데 그걸 열 장 모으면 인근의 중국집에서 탕수육으로 교환해 오거나, 멸균우유로 교환을 해왔다. 당시에는 가끔 있는 그런 이벤트가 좋았는데,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나를 위해 저녁 식권을 모아 온 것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먹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모부가 이혼을 한 뒤 엄마는 원래 일하던 곳의 소장과 함께 자주 다녔다. 나를 데리고 다른 지역으로 놀러 가서 모텔에 가서 나만 방에 두고 소장과 자리를 비운다거나, 일을 그만둔 뒤에도 엄마가 사는 지역으로 소장이 놀러 온다거나.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어렸을 때의 나는 그저 엄마가 원래도 아파트 부녀회장을 하거나, 계모임을 하거나, 주부대학을 다니는 등 마당발로 활동하다 보니 그냥 인기가 많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골프장에서 일하게 됐을 때도 같이 일하는 골프 강사에게서 20만 원 대의 내 선물을 받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내 착각이었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 때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앓고 있던 부정맥 때문은 아니었다. 강원도에서 일하던 엄마는 산골에서 골든타임을 놓친 채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실려왔다고 한다. 당시 나는 친척집에 살고 있을 때였다. 엄마는 공주 공주하면서 나만 찾았다고 한다. 공주라는 뜻으로 부르지만 발음은 “공지”에 더 가깝다. 친척이 며칠 째 잠 못 이루는 채 고민하는 것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멋도 모르고 그냥 다쳤겠거니 하고 괜찮겠지 하고만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친척들이 모여있다니 그것도 좋았다. 아주 어리고 멍청했다. 그 친척들이 병원에 모두 모여있다는 것 자체가 시그널이었는데.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신 걸 기점으로 천천히 그들과 멀어질 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친척들은 돈이 든다며 엄마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했다. 엄마의 그 많은 친구들 중 어느 하나도 부르지 못했는데, 그 와중에 친척들은 내게 아비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다. 다들 그것도 아비라고 부르라고 했다. 어떻게 될지가 뻔한데도. 중환자실로 들어간 엄마는 투약되는 약이 떨어지고 나면 더 이상의 연명치료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 사정인지 연명치료가 들어갔고, 다시 항의를 해서 약이 떨어지고 나면 산소호흡기도 떼기로 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부정확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생겨서 나는 장례식장에 친척들과 대기하고 있고, 엄마의 숨이 멎기만을 기다리던 것이 기억이 난다. 비참했다. 엄마가 죽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니.


엄마의 장례식을 위해서 그 전날에는 친척집에 가서 내 짐 속에 있던 엄마의 사진을 추렸다. 영정사진을 위해서였다. 영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이었다. 엄마답지 않았다. 퀸 사이즈 침대에 누워서 친척과 함께 자려는데,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이모는 잠이 들어있었다. 다음날 친척들에게 말을 했더니 엄마가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왔나 보다고 다들 말을 했다.  


장례식장에는 친척들만 와서 조촐하게 밥만 먹었다. 엄마는 친구며 지인이 많았는데 그중 어느 한 명도 부르지 못했다. 내가 장례비용을 내는 것도 아니었고, 장례식을 도맡아서 진행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나는 고작 열여섯이었다. 거기에 불청객인 아비가 꼈다. 원래 장례식 때는 잠을 자면 안 된다는 말도 있던데 너무 피곤했던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까만색 상복을 입고 흰 리본 핀을 꽂은 채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비는 술 꼬장을 부리며 친척들과 싸움을 일으켰다.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아비의 안경이 내려가서 친척이 올려주려고 했는데 술에 취해 자신을 치려는 것으로 오해한 아비가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자기 인생을 망쳤다며. 누가 누구 인생을 망쳤다는 건지. 칼부림이 안 난 게 다행이었다. “너 우리 언니한테도 이렇게 했나”하면서 언성이 높아졌다. 칼을 꺼내오라니 어쩌느니 경찰을 부르니 마니 난리였으니까. 친척들은 내게 아비를 데리고 어디로든 데리고 가라고 했다. 나는 대체 어디로 데리러 가느냐고 무슨 말을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엄마가 죽을 때도 울지 않았던 나였다. 울지 않던 내가 울자 그제야 친척들은 내게 미안하다며 토닥여줬다. 


그 후로 나는 여전히 얼마간 친척집에 얹혀살았다. 소장은 내게 몇 달간 용돈을 부쳐줬다. 친척은 고마워하라며 안부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도저히 친척과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내가 중학교 졸업할 때쯤 친척이 이사를 한다고 하자 나는 따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친척이 나 때문에 며칠간 밤을 지새운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결코 따라가서 살 생각이 없었다. 내가 살아있을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대신 친한 여자 선배네 집의 작은 방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내 인생은 고작 당신 때문에 망쳐지지 않는다. 영원히 만나지 않길 바라며, 나는 간혹 떼는 서류에 당신의 사망 소식이 떠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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