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편집증과 의처증도 있었다. 새벽이면 나는 엄마와 함께 친척집, 엄마의 친구집, 모텔, 차 안을 전전했고, 나는 갈 곳 잃은 슬픔과 분노로 삶을 이어갔다. 원흉은 빚보증이었다. 이복 언니, 이복 오빠와 함께 살던 나는 밤이면 들려오는 맥주병 깨지는 소리, 소리치는 언성을 들으며 무럭무럭 자라났고, 차라리 외동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편했다. 덧붙일 말이 별로 없어졌기 때문이다. 거추장스러웠던 가족은 모부의 이혼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남은 이 앙금은 무엇인가.
대기업을 다니던 아비는 빚보증과 함께 우리 집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가난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밖으로 나간다고 하던가. 우리 집안에서는 사랑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무관심과 욕설 그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척집을 전전하던 나는 전학을 자주 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늘어나는 주민등록초본의 페이지가 거추장스러웠다. 학교에 등본을 내야 하는 날이면 새삼스레 귀찮았다. 부끄럽지는 않았다. 엄마와 나의 사이는 좋은 듯했지만, 엄마는 내게 짜증을 자주 냈다. 나 역시 응석을 부리고 싶을 나이였는데 잘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부정적인 감정을 잘 표출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내게 있어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건 말 그대로 척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와중에 초등학교 전교 부회장이 되었다. 문제는 다시 생겨났다. 없는 집 자식이 전교부회장이 된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야간 운동회를 하자는 전교회장 부모의 제안에 몇 십만 원의 돈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억대의 빚을 지고 있던 우리 집에서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엄마는 전화로 내게 축하한다는 말 없이 “너 전학 가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끊었다. 나는 바로 옆 동네 학교로 급히 전학을 갔고, 친구들의 질문에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순간은 있었는데, 엄마와 함께 두 평도 되지 않는 쪽방에서 살 때의 일이다. 쪽방촌에서 한 학기가 안 되는 기간 동안 살았다. 엄마는 계속 나와 함께 하지 못했고 한 달에 몇 번 정도 찾아와 이마트에 차를 타고 장을 보러 다녔다. 한 달 치의 장을 두둑이 보고 돌아오는 날이면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엄마와 웃었다. 우습게도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행이면서도 서글픈 일이다. 행복한 순간인데도 잘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리고 나는 반장 선거조차 나가지 못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어둡다거나 교우 관계가 나쁘진 않았다. 친구가 많았고 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살았다.
나는 어느 순간 또다시 친척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 순간은 어쩌면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부가 이혼을 하네마네 하는 언성을 높이고 나서 남겨진 엄마와 집을 방문한 친척은 나의 거처를 두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띠 내떤지고 와라(떼어 내던지고 와라).”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뱉은 친척집에 맡겨지게 된 것이다. 친척집에 놀러 간 날 자기 전 엄마는 친척과 잠깐 살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나는 이전의 기억이 떠올라 싫다고 했다. 엄마는 “니는 니 생각만 하나.”라며 나를 타박했다. 강압적이었다.
나는 정해진 수순대로 정서적인 학대를 받고, 통제당하는 삶을 살았다. 타인과 사는 방식을 맞추려면, 그 집에 얹혀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지, 몇 시에 자야 하는지, TV와 컴퓨터는 얼마나 해야 하는지, 졸린데도 공부는 새벽까지 해야 한다거나, 속옷은 무엇을 입는지까지 말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친척 나름의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그것은 내게 학대의 상처를 남겼고, 아비와 별 다를 바 없는 고통을 주었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가고자 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함께 살자던 엄마와의 약속 덕분이었다.
엄마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직은 내가 어린 나이일 때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골든타임을 놓친 채 실려왔는데 친척들은 내게 며칠을 숨겼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뇌사 상태였다. 엄마는 나를 계속 찾아댔다고 한다. 나는 엄마를 마주할 용기가 있었을까. 잠자는 듯 누워있는 엄마를 보며 멍하니 바라봤다. 엄마의 손목은 여러 바늘이 꽂혀있고, 피멍이 들어있었다. 나는 엄마와 일주일이나 통화를 하지 않았다. 외로웠던 나머지 예전 학교 친구들과 통화를 하다가 휴대폰 요금이 많이 나오자 친척이 나를 크게 나무랐고, 전화를 하기가 무서웠다. 돈이 무서워서 전화를 못했는데 마음의 부채를 떠안게 됐다. 영영 통화를 못하는 사이가 될 줄 알았는데 엄마는 종종 꿈에 나타나 나와 전화를 했다. 꿈에서라면 얼굴을 마주쳐도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했다. 어둠이 찾아와도 빛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일단은 친척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그렇게 어렸던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미래를 알게 되었다면 조금은 편안해졌을까.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됐을까. 어느 날 본 프로그램에서 외로워서 일찍 잠든다는 어떤 할아버지의 말에 눈물을 흘렸던 그날, 나 역시 일찍 잠이 들었다. 더 이상 사무치게 외로워하지 않는 날이 온다고, 사람은 누구나 조금은 외로운 거라고 말해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까. 좋은 어른들이 많아서 어떻게든 자라났다.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나는 나를 조금 덜 미워하고, 내 잘못이 아니었던 지난날을 용서해 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