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울수록 아픈 질투의 법칙
며칠 전, 오랜 친구가 이런 전화를 걸어왔다.
“야, 드디어 집 샀다.
대출이긴 한데, 그래도 내 명의야.”
목소리엔 흥분이 묻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와, 진짜 대단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그걸 해냈냐.”
진심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난 뒤, 잠깐 멍해졌다.
그 친구는 나와 같은 나이, 같은 학교, 같은 시작선이었다.
함께 나의 자취방에서 라면 끓여 먹던 친구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내 집이 아니라 그의 집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축하의 말을 남겼지만,
휴대폰을 내려놓자 묘하게 손끝이 따뜻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쟨 진짜 내 죽마고우인데, 왜 이리 축하가 건조하지?’
그날 밤, 친구의 인스타그램 피드엔
하얀 벽, 원목 바닥, 초록색 몬스테라 화분이 걸려 있었다.
댓글엔 “너무 멋지다!”, “우리 언제 집들이야?”가 줄을 이었다.
나는 ‘좋아요’를 눌렀지만,
손가락보다 먼저 눌린 건 마음이었다.
이상하다.
삼성 회장이 빌딩을 열 개 사도 감흥이 없는데,
내 친구가 오피스텔 하나 샀다고 하면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인다.
왜일까?
그 이유를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 는 이미 설명했다.
그의 사회비교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에 따르면,
우리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즉, 비교의 본질은 숫자가 아니라 거리다.
멀리 있는 성공은 단순히 구경거리가 되지만,
가까운 성공은 나의 ‘좌표’를 흔든다.
“같이 출발했는데,
왜 저 사람만 그렇게 멀리 갔지?”
그 질문이 생기면, 마음의 평형이 깨진다.
질투는 타인의 성공이 아니라,
나의 위치감각이 흔들릴 때 생긴다.
예전엔 친구와 함께 걸어갔다.
서로 밥값도 나누고, 월급날엔 치킨도 시켜 먹고,
‘우린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같은 길이 아닌 경주 트랙이 되어 있었다.
그 친구가 앞서가면, 나는 자연스레 뒤를 의식했다.
관계는 더 이상 ‘함께’가 아니라 ‘대조’가 되었다.
“요즘 일 너무 잘 풀려.”
그 말은 원래 ‘내 삶의 변화’를 말하는 문장인데,
내 귀엔 “넌 아직 제자리야”로 번역된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이게 바로 거울자아(The Looking-Glass Self) 의 작동 방식이다.
사회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 Mead)는 말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본다.”
즉, 친구는 단순한 타인이 아니라 ‘내 존재의 거울’이다.
그 거울이 갑자기 반짝이기 시작하면,
그 안에 비친 내 모습이 덜 빛나 보이기 마련이다.
인지과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뇌는 매우 구식이다.
아직도 원시시대의 코드로 세상을 해석한다.
타인의 성공 = 나의 생존 위협.
이 단순한 등식이 여전히 작동한다.
고대 인류는 무리 안에서 서열을 감지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사냥을 더 잘하고, 누가 더 사랑받는지가
곧 생존의 문제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친구가 더 잘됐다’는 사실은
뇌에게 일종의 경고음으로 들린다.
“너의 위치가 불안정해졌다.”
이건 논리가 아니라 본능이다.
논리로는 “친구의 성공은 나의 실패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뇌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SNS를 스크롤하는 손가락은 이미 경보를 울리고 있다.
(사실 뇌가 경보를 울리는 것이다.)
결국 질투는 타인의 행운이 아니라,
나의 불안한 존재감에 대한 감정이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가까운 사람의 행복 앞에서는 조금 더 솔직해지지 못한다.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속으로는 약간의 미묘함을 숨긴다.
“야, 진짜 잘됐다. 근데... 너무 잘됐다.”
이 문장은 반쯤 진심이고, 반쯤 자조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의 성공은 나의 기준을 다시 써버린다.
같은 부모 밑, 같은 학교, 같은 나이 —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의 성공은 ‘나의 미달’을 더 선명하게 비춘다.
이건 단순히 부러움이 아니라, 존재의 재조정이다.
질투는 결국 “나의 위치”를 재정비하려는 심리적 반응이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진짜로 질투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감정이 없다는 건, 관계가 멀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친구의 성공이 나를 흔든다면,
그건 내가 여전히 그 관계 안에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다.
질투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애착의 잔향이다.
(알겠지 친구야? ^^)
나는 그 친구가 미워서 불편했던 게 아니다.
그의 성공 속에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질투는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라, 욕망의 언어다.
그걸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성장의 동력을 잃는다.
이제는 친구의 새집 사진을 봐도 예전처럼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사실 여전히 흔들린다.)
그리고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
(배아프지 않다고 말 안했다.)
가끔은 그의 새집 사진에 이렇게 댓글을 단다.
“인테리어 너무 예쁘다. 근데 조명 좀 덜 밝혀라,
내 월세가 눈부시단다 ^^”
그럴 땐 이상하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 감정을 농담으로 다룰 수 있게 됐다는 건,
아마도 내가 그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반박시 네 말이 맞다.)
예전만큼 마음이 흔들리진 않지만,
가끔 밤에 불 꺼진 방 안에서
그의 따뜻한 조명 사진을 보면,
내 방이 유난히 푸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되려, 질투가 사라졌다는 건
내 안의 욕망이 식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질투는 내 안의 결핍이 아니라,
아직 성장하고 싶은 신호이다.
누군가의 성공은 나를 흔든다.
하지만 누군가의 사랑은 나를 무너뜨린다.
친구의 집은 부러움으로 끝나지만,
사랑의 장면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층을 건드린다.
관계 속의 질투는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존재의 재정의다.
다음 장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사랑이 끝난 뒤,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웃고 있을 때,
우리 마음이 왜 그렇게 요동치는지에 대하여.
“질투는 성공의 크기에서 자라지 않는다.
관계의 거리에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