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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Nov 09. 2019

#29 덜어내기 2.0

전편: #28 가끔 고백한다. "선생님도 난처해"

https://brunch.co.kr/@simon1025/59



이제 우울함은 나에게서 많이 덜어지고 있었다. 교실에서 어느 정도 농담도 할 수 있었고, 환희 웃을 수도 있었다. 언뜻 보기에 온전히 정상궤도에 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상처에 생긴 딱지가 툭 하고 떼어진 것 마냥 쓰라린 때가 종종 찾아왔다. 아이들은 오늘 잘했다가 내일 딴 사람으로 변해 있곤 했다. 그럴 때면 스트레스에 크게 흔들렸다. 분명 어딘가에 덜어낼 곳이 더 남아있었다.


교실을 더 둘러보았지만 많은 곳에 이미 덜어내기의 손길이 거쳐 갔다. 더 덜어내었다간 교실붕괴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덜어낼 곳이 찾아지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덜어내기는 더 이상 교실에 있지 않았다. 덜어내기는 내 안에 있었다. 애당초 덜어내기를 시작했을 때 꼼꼼한 설계를 바탕에 두지 않았다. 무작정 눈에 띄는 괴로움부터 없애나 갔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내면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이제 덜어내기에 업그레이드가 필요했다.


덜어내기 2.0, 목표는 나 자신.


나를 향한 덜어내기를 시작했다.


완벽주의는 한때 나의 자랑이었다. 나를 소개하는 멘트에는 언제나 완벽주의가 들어갔고, 가장 강조한 것 역시 완벽주의였으며, 끝까지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것 또한 완벽주의였다. 그만큼 완벽주의는 나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긍심과는 동떨어지게 완벽주의는 교실과는 영 상극이었다. 그 말인즉슨 완벽주의로 비롯되는 괴로움이 많았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나의 가장 듬직한 우군이었던 완벽주의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완벽주의가 말썽을 일으킨 때가 또 언제였는지 생각해보니 군 생활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군대에 있을 때 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선임이었다. 사실 가장 까칠하고 엄격한 선임이었다. 병장이 되었을 때는 수송대대 100명이 넘는 인원 중 가장 무서운 선임으로 꼽힐 정도였다. 간부들은 내가 질서를 잡는 악역을 자처한다며 나를 격려했으나 악역을 자처한 것도, 간부들에게 예쁨을 받고자 그리 한 것도 아니었다. 온전히 완벽주의로 인해, 후임들이 정도(正道)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로 인한 부작용은 후임들과의 불편한 관계였다.


교실과의 공통점이 있었다.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 규칙을 지켜야 할 이들이 있다는 것. 차이점이라면 군부대냐 교실이냐 정도였다. 아니, 공통점이 한 개 더 있었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솔직해야 하는 법이었다. 불편한 관계. 군 생활 시절 후임들과도 그랬고, 교실에서 아이들과의 관계도 그랬다. 완벽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불편한 관계 또한 그대로 유지될 것임이 자명했다. 그러나 교실에서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후임들과는 끝까지 풀지 못한 불편한 관계의 역사를 아이들과는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완벽주의는 최소한 교실에서는 약보다는 악이었다. 내려놓기로 했다. 다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왜 유독 교실과 군 생활에서 완벽주의가 말썽을 일으켰는지. 평소 일상생활을 할 때에는 완벽주의는 오히려 득이었다. 여타 사람들보다 집을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었고, 업무를 함에 있어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후임들과 아이들에게는 문제였을까. 완벽주의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하니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포스트에서 인용된 논문에 따르면 완벽주의는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그 유형의 명칭은 자기 지향 완벽주의, 타인 지향 완벽주의, 사회 부과 완벽주의인데, 이 중 내가 속해있는 것은 타인 지향 완벽주의였다. 타인 지향 완벽주의는 주변 사람의 행동과 성과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준을 세워놓고 엄격하게 평가하며 비난하는 유형을 뜻하는데, 쉽게 말해서 나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다는 뜻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 역시 완벽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보다 후임들, 반 아이들에게 더 완벽함을 요구했었다. 후임들이나 반 아이들은 완벽하고 싶지 않은데, 완벽을 요구당했으니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완벽함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였다.


교실에서 발현되는 나의 완벽주의를 줄이는 데에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필요했다. 완벽함을 덜어내고, 획일적 잣대를 치우는데 유용한 방법이어야 했다. 때마침 적당한 우리말 표현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알고, 빈틈과 여유를 허용할 줄 아는 태도. 더불어 ‘헤아림’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포괄적인 표현.


너그러움

‘너그러움’의 자세를 몸과 마음에 새겨보기로 했다.


‘너그러움’을 발휘하기 위한 첫 대상은 첫 덜어내기와 같이 숙제였다. 덜어내기를 통해 숙제를 파격적으로 줄이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숙제가 있었다. 생존된 숙제는 일기 쓰기와 성격 강점을 발휘한 인물 조사하기였다.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며 유예기간을 준 것이었다. 확실히 아이들은 전보다는 훨씬 일기도 꼼꼼하게 쓰고, 성격 강점을 발휘한 인물 조사도 철저하게 했다.


다만, 몇 명이 문제였다. 대략 3~4명. 고정적으로 이 아이들은 숙제를 안 해오거나 하더라도 한 줄 혹은 두 줄을 휘갈겨 쓴 채 숙제를 던져 놓았다. 숙제를 줄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따위로 숙제를 해오는 게 괘씸했다. 이 아이들에게는 덜어내기를 하기 전과 같이 꾸중을 하고 하교 후에 남겨서 열 줄 이상 쓰도록 강요했다. 꾸중을 듣는 아이들의 숫자가 적어졌다 뿐 여전히 남아서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건 똑같았다.


이 또한 완벽주의로 비롯된 문제일 수 있었다. ‘너그러움’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에게 매번 같은 양질의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그래도 전에는 아예 안 했는데 두 줄이라도 쓴 것 자체가 발전이다’

‘숙제하는 것을 깜빡했을 수도 있다. 숙제를 못했다면 내일이건 모레 건 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생각의 무게는 가변적이었다. 변화를 품지 않으려는 생각은 바위처럼 무거웠으나 변화를 품으려는 생각은 얇은 종이 쪼가리 마냥 가벼웠다. 관점을 바꾸니 생각이 바뀌었다. 숙제를 해오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꾸중의 언어를 표현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고, 재촉을 삼갔다. 숙제를 대충 해왔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의 숙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아이는 없었다. 어차피 숙제는 아이들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본인들이 필요성을 느낀다면 알아서 잘 해올 터였다.


그동안 완벽주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상황에 대하여 ‘너그러움’의 자세를 다방면으로 적용했다. 수업시간에 배움 노트를 깔끔하게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을 멈췄다. 미술과목에서는 꼼꼼하게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깔로 채우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라도 완성시켜야 한다는 강요를 거두어들였다. 수업 시작 시간을 조금 지키지 못하고 늦게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내는 모습을 청산했다. 청소상태가 조금은 지저분해도 지적하지 않고 내가 빗자루를 들었다.


내게서 덜어낸 마음의 크기만큼 다른 곳에 ‘여유’라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완벽주의는 나 하나로 족했다. 나 또한 완벽하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완벽을 바라는 것은 꼴 사나운 일이었다. 거대한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양자의 불확실성이듯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완벽주의는 더 이상 내게 자랑거리가 아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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