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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Nov 11. 2019

#30 공감해보기로 했다.

전편: #29 덜어내기 2.0

https://brunch.co.kr/@simon1025/64




‘만약 내가 너를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너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껴야 한다.

만약 너의 행동이 나쁘다고 느끼면 

너도 그렇게 느껴야 한다.

만약 내가 원하는 어떤 목적이 있다면

너도 그렇게 느껴야 한다.’

-칼 로저스, <진정한 사람되기>-



‘애들은 도대체 왜 저렇게 행동할까?’

‘방금 전에 혼났는데 또 똑같이 행동하네?’ 


나는 아이들의 행동 원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무지는 초등학교 교사가 적성에 맞지 않음을 느끼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상담을 공부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하였지만 교재 속 이론과 현실의 아이들은 많이 달랐다. 더군다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이나 융의 분석심리이론을 통해 아이들 행동을 잠시 이해했다 치더라도 머리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해는 바람에 모래 날리듯 금방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아이들을 탐구했던 까닭은 나를 위함이 더 지배적이었다. 아이들의 행동, 특히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스트레스가 덜 할 것 같았다. 


결국 이해는 못했으니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다른 길을 찾는다는 것은 덜어낸다는 것이었다. 덜어내기의 본질은 변화였다. 변화는 가벼움을 필요로 했고, 가벼워야 하는 것은 관점이었다. 이해라는 관점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해에게는 멀고도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공감

비슷한 듯 다른 이해와 공감은 서로 다른 뇌를 필요로 했다. 이해가 왼쪽 뇌, 즉 이성을 필요로 했다면 공감은 오른쪽 뇌, 감정을 필요로 했다. 이성으로 논리적인 이해가 되지 않을 땐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공감을 해보는 게 어떨까 싶었다. 공감도 연습이라지만 무턱대고 ‘자 이제 공감해볼까!’ 하며 공감할 수는 없었다. 특히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남자인 관계로 공감을 어떻게 해봐야할지 더더욱 막막했다. 건조한 공감의 기능을 촉촉하게 일깨워줄 촉매제가 필요했다. 


최근에 내가 했었던 공감이 뭐였는지 떠올렸다. 아! 며칠 전에 깊은 공감의 기억이 있었다. 동아리 졸업생 모임에서 입대를 2주 앞둔 후배를 만났다. 가타부타 긴 말은 필요 없었다. 후배의 눈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감이 이루어졌다. 물론 공감의 감정만 있지는 않았다.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로 대신한다. 어쨌든 공감을 위한 촉매제를 발견한 것 같았다. 경험! 경험을 떠올리면 공감이 물씬 발휘됐다. 아이들에게 공감하기 위해서는 내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학창시절의 경험은 먼 옛날 옛적일은 아니었다. 공감을 위해 기억 저편에 있던 나의 학창시절을 소환시켰다. 나는 어떤 학생이었을까.


학생이라고 불릴만한 신분이 부여되는 초등학교 1학년. 난 한글을 떼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산만했고, 관심은 오로지 먹는 일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밖에서 뛰어 노느라 얼굴은 시커멓게 탔다. 눈빛은 흐리멍텅했고, 말투는 어버버했다. 그러한 나의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 정상범주에 들어있지 않았다. 고모는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볼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난 병원에 가지 않았고, 그저 즐겁기만 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담임선생님에게 처음 대들었다. 당시에 난 분명 짝꿍과 서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짝꿍에게는 구두지도만, 나에게는 손바닥 매를 때리셨다. 그때 내 짝꿍은 공부도 잘하고, 발표도 잘하는 예쁜 여자아이였다. 분명한 차별이었음을 어린 나는 충분히 느꼈다. 분개하는 표정과 함께 억울함의 눈물을 흘렸고, 담임선생님은 또 한 번 혼을 내었다. 다시 한 번 앞으로 불려 나온 나는 눈물과 콧물로 얼굴을 뒤덮은 채 “왜 나한테만 그래욧!” 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날 이후 난 선생님에게 대든 못된 아이로 찍혔다.


초등학교 6학년 쯤 되어서는 잘 노는, 아주 잘 노는 친구들을 만났다. 수업은 종종 땡땡이를 쳤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여자아이들과 어울려가며 일탈을 즐겼다. 공부는 여전히 뒷전이었고, 학기마다 있었던 시험은 거의 백지상태로 제출했다. 시험시간에 당시 담임선생님이 “하나도 모르겠지?”라는 꾸중 섞인 농담을 했다. 그리고 난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서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어서는 사춘기의 바람을 거세게 맞이했다. 우리 집에는 고등학교에서 미친개라고 불리는 생활부장 아빠가 있었다. 비뚤어진 마음을 집에서 풀어놓았다간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집에서 풀리지 못한 반항기는 학교에서 모습을 과시했다. 왠지 담임선생님 말에는 토를 달고 싶었고, 혼나는 모습이 멋있어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이유로 중학교 생활 내내 담임선생님과의 관계는 파행이었고, 공부는 밑바닥을 맴돌았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빠는 나에게 전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권했다. 어차피 공부로 승부를 보지 못할 바엔 미리 기술을 익히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나는 강력히 거부했다. 입으로는 열심히 하겠노라 반성과 다짐의 말을 쏟아내었지만 속마음은 쪽팔림이었다. 그때 나는 전문계 고등학교는 공부를 못하는 애들이 가는 학교로 인식하고 있었다. 내 속마음이 어찌됐든 아빠는 내 말을 믿어주었고,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하필이면 내가 진학했던 고등학교는 아빠가 전년도까지 근무했었던 학교였다. 모든 선생님들이 기대하고 있다는 눈치였다. 심지어 교감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눈도장을 찍으셨다. 아무래도 부담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담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공부에 대한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과제는 귀찮기만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이 얼마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취업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국내에 1개 밖에 없다는 헬리콥터 조종학과를 희망했으나 부모님의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선에 관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부리나케 공부를 시작했다. 워낙 기초가 없던 터라 중학교 1학년 수학문제집부터 구해서 풀기 시작했고, 영단어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방법이 좋았는지 성적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반에서 15등 안에 들어보는 게 평생소원이었던 나는 전교 15등 안팎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능을 보고 교대에 입학했다. 



이게 내 인생이었다. 나는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어쩜 나 스스로를 그렇게 뻔뻔스럽게 속이고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7살부터 시작한 학생생활 중 11년이 말썽꾸러기의 삶이였다.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하고, 성실했던 것은 겨우 1년, 고등학교 3학년이 전부였다. 공부를 싫어했고, 선생님 말씀에 어떻게든 반대로 하고 싶어 했고, 존중과 배려는 마음속에 담아둔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럴 수가. 말썽꾸러기의 마음을 말썽꾸러기였던 내가 가장 몰랐다니. 말썽꾸러기일 때의 감각과 생각들을 끄집어내었더니 아이들의 행동이 조금씩은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어떤 욕구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어떤 결핍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속에 불이 나고, 얼굴에 열도 올랐다. 다만 전과는 다른 차이가 생겼다. 하루 종일 스트레스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쯤 흐른 뒤에는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때에는 대충 ‘나도 공부하기 싫었잖아.’, ‘귀찮았겠지’라는 성인군자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여 스스로에게 감탄할 정도였다. 


아이들에게도 공감의 표현을 조금씩 흘렸다.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함을 유지했으나, 감정에는 공감을 조금씩이나마 해주었다. 공감은 태양빛이었다. 나그네의 겉옷을 벗긴 것은 거센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빛이었듯이 공감을 받은 아이들은 조금 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뉘우치는 기색을 내보였다. 문제가 훨씬 안정적이고, 빠르게 해결되었다. 공감이 가진 힘을 여실히 느꼈다. 


이상했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오로지 아이들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덜어내고 덜어내다보니 계속 변화의 화살은 나를 향했다. 이쯤되니 내가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나의 히스테리가 교실을 날카롭게 만들었는지는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거의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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