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람 Nov 13. 2019

#32 나의 쓸모를 나의 존재를 위해.

전편: #31 1년 내내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만 할 거야?

https://brunch.co.kr/@simon1025/66




‘자기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깎아내리지 마라

그런 태도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꽁꽁 옭아매게 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지금까지 살면서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을 항상 존귀한 인간으로 대하라’

-니체, <이 사람을 보라>-


퇴근 후 소파에 앉아 잠시 멍을 때렸다. 딱히 지쳤거나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은 날은 아니었다. 다만, 햇살이 조금은 따스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었다. 그렇게 앉아있자니 지난 몇 달간의 기억들이 필름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의욕과 열정으로 가득 차 아이들을 빨리 맞이하고 싶어 했던 겨울방학, 긍정심리학을 주제로 수업을 꾸리며 연구보고서를 틈틈이 작성하던 학기 초, 뜻하던 대로 잘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며 아이들이 미워지기 시작하던 날, 겹겹이 쌓인 스트레스가 터져버린 후 우울증에 매일 매일이 회색빛이던 날들, 어떻게든 이겨내고자 덜어내기를 시작한 날, 덜어내기를 통해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나의 하루들. 짤막한 필름 컷에 유난히도 많은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장면들 가운데 내가 나를 위하는 장면이 하나 없었다. 책을 읽으면 언제나 교실과 아이들을 위한 책이었고, TV를 보아도 ‘차이나는 클라스’, ‘알쓸신잡’처럼 누군가에게 전달해줄 수 있을만한 지식 프로그램만을 좇았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였는데, 어느 순간 다른 인생들을 위한 보모의 삶으로 변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의 직업적 특성과는 무관하게 나를 위한 시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단지 덜어낼 뿐만 아니라 치유되고 싶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쭉 살폈다.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하버드 감정수업’, ‘그릿’, ‘최고의 교사는 어떻게 가르치는가’


읽고 싶지 않았다. 읽어봤자 계속해서 교실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을 것 같았다. 그런 책 보단 좀 더 가볍게 읽을 책이 필요했다. 다음날 학교 도서관에 갔다. 이전과는 다른 책을 찾았다. 뭔가를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은 책, 나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을 만한 책을 찾았다. 아무래도 학교 도서관 이다보니 교육과 관련된 책이 많았다. 그런 책을 피하며 꽂혀있는 책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쑥 훑었다. 어느 순간 시선을 끄는 책이 보였다. 책의 제목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과는 확연히 그 결을 달리하는 책이었다. 난 죽고 싶을 때 떡볶이가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죽고 싶을 때 떡볶이를 먹고 싶은 심정은 알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으며, 어떻게 이겨내었는지 알고 싶었다. 더 이상 뭔가를 배우는 책에는 진저리가 났다.


책을 빌렸다. 막상 책을 빌려놓고는 바로 읽지를 못했다. 책을 읽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마침 학교장재량휴업일이 끼어있는 연휴를 앞두고 있었다. 연휴가 되어 잠시 묵혀놓았던 책을 꺼냈다. 책은 금방 읽혔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았고, 나 역시 덤덤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읽었다. 이전에 읽었던 책들과 같이 ‘유레카!’, ‘와 이런 재미난 사실이 있었네!’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감흥도 그닥 없었고, 느낀 바도 별로 없었다. 단 하나, 단촐한 생각 하나가 저릿하게 떠올랐다.  


‘아 이게 나를 위한 독서구나’


그 동안 했었던 독서가 완전히 틀렸다거나 엉망이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 얽매여있었음을 느꼈다. 우리 집 책장이 보여주듯 지난 몇 달간 내가 읽었던 책들은 읽고 싶었던 책이라기보다는 읽어야 될 것 같은 책들이었다. 나를 위한 독서라기보다는 남을 위한 독서였다. 부수적인 의무감에서 벗어나 진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은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나를 위한다는 의미를 깨달았다. 나의 하루에 경계를 그었다. 한 쪽은 교사의 영역이었고, 또 다른 한 쪽은 ‘나’의 영역이었다. 퇴근 후와 주말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꾸렸다. 우선 퇴근을 하고 나면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잊고자 노력했다. TV를 보더라도 교육에 관련되어 있거나 교양채널인 경우 과감히 채널을 돌렸다. 내 마음 속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 현재 가장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뭔지 스스로 되물었다. 역시나 대부분은 예능이거나 로맨스 프로그램이었다. 전에는 무의미한 시간을 그저 소모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채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원하는 채널을 틀고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머리를 비우고 있자면 안락함이 나를 찾아왔다. 얼마쯤 그렇게 있다가는 저녁밥을 고민했다. 대충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식사와 맛있는 식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그저 그런 식사는 식사라기보다는 사육에 가까웠다. 과장이랄 것도 없었다. 냉장고는 사료 보관함이었으며, 식사시간은 그저 배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대부분 같은 모습이었다. 냉동밥을 해동시킨 후 차가운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삐쩍 마른 반찬가지 몇 개를 꺼내놓고 8분 혹은 9분 정도로 식사를 마무리 짓는 모습. 사료를 먹는 것은 짐승에게나 기쁜 일이지, 나에게는 썩 기쁨을 느낄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의 영역에서는 모든 행위가 나의 행복을 위한 일이 되어야 했다. 사료를 치우고, 그 날의 기분에 어울리는 저녁밥을 준비했다. 따끈따끈한 밥에 맛있는 향이 도는 메인반찬을 마련했다. 밥하기가 귀찮은 날에는 외식을 했다. 특히 월급날에는 비싼 돈을 들여 꼭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었다. 하루는 그 날의 저녁식사를 기대하는 날이 되고, 한 달은 그 달의 만찬을 기대하는 달이 되었다. 식사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었을 때 음식은 비로써 배를 채우는 것뿐만 아니라 지친 마음을 채워주었다.


금요일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월요일 치의 수업 준비를 마무리 지었다. 주말을 수업준비에 할애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 교육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학교에 내려두었다. 대신 주말이 되면 주로 여행을 준비했다. 공연을 보러가기도 하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러 가기도 했다. 여행을 가지 않은 날에도 근처 어디론가는 떠났다. 짧은 이틀이지만 나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주말동안 에너지를 채우고 나면 스트레스를 버틸 수 있는 큰 동력이 생겼다.


지금까지 힘들고 어려운 때에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으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나 스스로를 생각하며 나를 위로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나의 쓸모를 얕보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선물이었다. 멋지고 화려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오롯이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뿐이어도 충분했다. 나만을 위한 책, 나만을 위한 커피, 나만을 생각하며 걷는 산책, 나를 표현하는 글. 이 모든 것들이 사실 나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었다. 나만을 위한 것은 절대 이기적이기도, 얄미운 것도 아니었다. 작고 소박할지라도 나로부터 선물을 받고 나면 나는 더욱 힘이 날 수 있었고, 우울해하지도 않을 수 있었으며, 내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었다. 나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우선으로 나를 위하는데 있음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이전 14화 #31 1년 내내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만 할 거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