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다, 스며들다
오랫동안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단순히 스쳐 가는 여행이 아니라, 그곳의 일부가 되어 살아보는 느린 여행.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실체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멀리 떠나야만 할 것 같았고, 그렇게 나는 길을 나섰다.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온몸으로 이곳의 겨울을 맞이했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고,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 반짝였다. 공기는 놀랍도록 맑았고, 하늘은 쨍하고 푸르렀다. 좀처럼 보기 힘든, 투명하게 빛나는 하늘이었다. 마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한 풍경이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짧은 꿈처럼 흘러갔다. 준비된 일정도, 해야 할 일도 없이 그저 이곳에 왔다. 도착하자마자 몰아친 눈보라로 집에만 있어야 했지만, 그 속에서도 이상하게 조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소복이 쌓이는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처음에는 이 고요함이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하얀 눈을 바라보며 생각을 비울 수 있는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외로운 순간이 찾아왔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이 점점 커졌다.
그때, 나를 이 고민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한국 분들의 따뜻한 환대였다. 유니님이 미리 이야기를 해주셨던 덕분에 처음부터 친근하게 대해주셨고, 마치 오랜 친구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처음 모임에 참석했을 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셨어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어느새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공간에서 따뜻한 말 한마디와 다정한 시선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컸다. 마치 오랜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익숙한 냄새, 정성껏 준비된 반찬들, 서로 먼저 먹으라며 내미는 손길. 그 순간만큼은 낯선 여행자가 아니라,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맛과 따뜻한 사람들 덕분에, 이곳은 더 이상 낯선 땅이 아니라 또 하나의 집처럼 느껴졌다.
친절은 단순한 배려를 넘어섰다. 낯선 곳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그 모임의 한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점점 익숙해졌다. 그 순간들은 더 이상 여행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오늘 저녁, 모임이 있었다. 유니님은 비빔밥에 들어갈 곤드레나물과 버섯나물 볶음을 준비했다. 지난번처럼 호박, 가지나물, 시금치, 콩나물, 소고기 등 각자 준비한 재료들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모두 함께 맛있게 비빔밥을 먹고, 간단한 게임을 하고 예배드리는 즐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이 모임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다음 달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정든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전했다. 정이 깊었던 만큼, 이별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곳에서 과분할 만큼 많은 친절을 받았고,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누군가 "꼭 다시 오세요."라고 다정하게 말했을 때,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왔다.
여행에서 가장 깊이 남는 것은 결국,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였다. 낯선 곳에서 정을 나누고, 또 다시 헤어지는 아쉬움이 있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대도 함께 생긴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오늘따라 밤하늘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불빛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처음 도착했던 날의 설렘과 낯섦, 창밖으로 쏟아지던 하얀 눈, 모임에서 함께 나누었던 웃음, 정성 가득한 음식을 나누던 시간, 그리고 오늘의 작별 인사까지.
모든 순간이 소중한 기억으로 가슴 깊이 남았다.
떠남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을 날을 기약하며, 이곳의 겨울과 따뜻한 환대를 가슴 깊이 품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