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원추리꽃은 유혹하네, 나의 여름을

by 초린혜원

매일 걷다 보면, 의외의 장소에서 전혀 뜻밖의 것들과 조우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한 차례 폭풍 같은 소나기가 낮동안의 찜통더위를 식혀준 그날도 역시 그랬다. 지금은'삼성 창조경제 혁신센터'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게 된 옛 제일모직 기숙사동을, 우산을 받혀 든 채 지나는 중이었다. 그곳은 걷기의 경로중 항상 빠른 걸음으로 스치듯 걷는 곳이기에 눈길은 언제나 보행의 방향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는데 세찬 비 탓이었을까, 아니면 빗물을 머금은 촉촉한 정경 탓이었을까, 내 눈은 어느새 건물의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정도로 벽 전체를 휘감고 있는 저 유명한 담쟁이덩굴 아래 수줍게 존재감을 드러낸 노란 꽃, '각시원추리'였다.


초록의 잎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샛노란 꽃, 역시나 백합과의 꽃들은 위험하다. 야리야리한 몸짓으로 눈길을 잡아채는 데는 언제나 일등이니까. 노란 꽃과 보색의 배치로 누운 초록의 줄기와 잎이, 나른한 몸짓으로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날 그 자리에서 만났던 각시원추리 꽃은 그랬다.


'나, 이렇게 한껏 물이 올라 있는데, 이래도 안 보고 지나갈 것이냐고.' 격정적이진 않으나, 어느덧 스며드는.

하여 이를 은은한 유혹이라 칭해 둔다. 아주 옛날엔 집안 깊은 곳, 여인들만 머무는 자리에 이 꽃을 심었다고도 하고, 꽃의 아름다운 자태와 그 쓰임새 때문인지 근심을 잊게 하는 꽃, 忘憂草라 불리기도 했단다. 누가 이 이름을 처음 불러 준지는 몰라도 그이의 가슴엔 아마도 큰 강이 하나 흐르고 있지 않았을까. 선지자들이 건넜다던, 이적을 행했다던 그 강. 적어도 이 꽃을 보고 있는 시간만큼은 어떤 걱정도 생각나지 않는 진공의 시공간 속에 홀로 존재하는 느낌이니 말이다.

비 그친 뒤, 존재감 뿜뿜. 각시원추리꽃

여름, 긴긴 장마기간 내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엔 지고 마는 짧은 생의 하루를 꽃차례로 이어가는 각시원추리, 그런 이유에서인지 꽃입술을 앙다물고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밤의 각시원추리꽃을 보고 있자니, 고단수도 이런 고단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정지한 채로 한참을 응시해주며, 눈빛으로 토닥여준다. 그래야 내일 해가 반짝 얼굴을 보이는 시간, 예의 그 새초롬한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


노란 정오의 태양을 그대로 들여놓은 초상,

'이래도 나를 모른 척할 수 있을 거 같아?' 준비된 질문을 사방에 흩뿌리는 정염의 자태. 어지럽다. 존재 자체가 중독적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裸身이다. 매일이 유혹으로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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