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편지, 딸에게

by 초린혜원

습관처럼 받는 사람이 누구이건 관계없이,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라는 문구를 마지막에 덧붙이곤 한단다.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말인 동시에 나에게 거는 주문 같은 한 문장일 수 있겠다. ‘행복’ 은 절대적으로 무형의 것이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왠지 유형의 것으로 다가와 내 주변을 온전히 채워줄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서라고나 할까?


그렇게 매일 ‘행복’을 외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행복한 사람’ 이 돼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이런 ‘자기 완성적 예언’ 은, 돌이켜보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자책이 들 때면 더 강도가 높아지곤 했던 거 같아. 왜 엄마는 이토록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은 것일까. 오로지 행복만이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일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불행한 삶’을 사는 건 인간에겐 절대 허용돼서는 안 되는 나쁜 길인 것일까? 오늘따라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구나.


‘행복’ 이란 건 어쩌면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로만 잴 수 있는 것이기에, 절대적인 행복도 그렇다고 절대적인 불행도 있을 수 없는 모호함의 경계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니 엄마는 오히려 마흔 후반까지는 ‘다른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 데, 나만 불행하다’ 는 맘을 거의 품어보지 않은 것 같아. 그저 하루치의 삶에 충실했고,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기꺼이 헌신 할 수 있는 용기도 있었던 것 같구나. 더구나 지나간 것들에 대한 회한은 될 수 있으면 빨리 지워버리고 ‘선택과 집중’을 가려하는 혜안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행복’ 에 목매기 보다는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한 뼘씩이라도 깊어지는 사람, 그런 좋은 사람으로 살기 원했던 건 아닐까 싶네.


쉰을 넘기면서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사람’ 으로 기울어져 있던 삶의 축이, 이따금 ‘행복한 사람’ 으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것 같아 흠칫, 놀라기도 한단다. 이럴 땐 정신이 번쩍 들게 누군가 홀연히 나타나 정신의 죽비를 후려쳐줬음 좋겠구나. 그이가 혹, 너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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