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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Aug 12. 2022

여름밤, 대청마루에 앉아 먹던 수박화채는...

영롱한 별을 품고 있었다.

                                                                                         

더위가 극에 달하는 삼복 중 말복쯤에 이르게 되면 시골에 계신 큰 외삼촌이 고기와 과일 같은 것을 넉넉히 마련해 우리 집을 방문하시곤 했다. 천성이 너그럽고 품이 넓어, 젊은 나이에 아이 셋 딸린 과부가 된 손위 누님, 즉 우리 엄마를 마치 여동생 돌보듯 살뜰히 챙기시던 분이었다. 당신도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농사와 축산 일에, 게다가 아이 다섯을 거느린 가장이었지만, 그 틈틈이 누이의 외로움과 가난의 그늘을 살피러 들리시고는 했었다.


지금이야 차로 얼마 가지 않으면 닿을 곳이지만 버스도 잘 다니지 않았던 시절, 산골에서 도심에 자리한 우리 집으로 오는 길은 험난함 그 자체였다. 경운기를 한 시간여 타고 내려와 버스를 타고 도심의 큰 시장까지 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야 당도할 수 있었으니까. 농사꾼으로 가장 바쁜 여름에도 매번 잊지 않고 삼복 중 하루는 시간을 할애해 이 고난의 외출을 감행하시던 분이었다. 내 큰 외삼촌은.


그 숱한 여름의 복날들 중 외삼촌이 집으로 오시던 날이면 평소에는 잘 먹지 못하던 소고기와 한 눈에도 너무 커서 며칠은 두고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던 수박이 우리의 식단을 책임져 주곤 했다. 복날임에도 닭 대신 소고기를 사 가지고 오신 큰 외삼촌의 깊은 마음을 훗 날 다 커서야 알게 된 어느 날, 난 목놓아 울었었다. 그 당시 우리는 소고기를 무시로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우리 삼 남매가 어딘지 모르게 허약하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더운 여름날, 고깃국이라도 끓여 든든하게 먹이라는 의중이었다고. 이런 넉넉한 '마음씀'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처럼 신이난 엄마는 큰 외삼촌이 바리바리 싸 오신 먹을거리로 우선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매운 소고깃국을 끓여낸다. 그 어떤 계절보다 삼복에 끓여내는 엄마의 육개장은 진한 맛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큰 외삼촌이 가져 오신 고기 덩이 자체가 워낙 컸었던 데다, 시골에서 직접 잡은 고기라 그 신선함도 동네 시장 육숫간이 따라가지를 못함이었다. 마치 사골을 우리듯 연탄불에서 오래 뭉근하게 끓여낸 육개장에는 삼촌이 직접 따서 말린 고사리며,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나물들이 고깃덩이만큼 풍부하게 들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국물 위로 둥둥 떠 있는 쇠기름을 한 숟갈 떠서 먹으면 등 뒤로 굵은 땀이 흐르면서 더위가 가시는 것은 물론이고, 납작해진 뱃가죽이 일시에 뜨끈해지며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받곤 했다. 엄마가 뜨거운 연탄 화덕 앞에서 분주하게 육개장을 끓이는 동안 대청마루에 앉은 큰외삼촌과 우리 삼남매는 그동안 밀린 얘기를 나누곤 했었다.


"공부는 잘하고 있재? 아버지 없다꼬 기죽으면 안 된다. 외삼촌도 있고 큰 아버지들도 계시고..."


"예"


"너거 엄마 고생하시는 거 알재? 그라이 너거들이 삐뚤러가믄(엇나가면) 안 되는 기라!"


"예...."


대충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다. 외삼촌은 우리의 외삼촌이기 전에 누이의 동생이었으므로, 젊은 나이에 아이 셋을 건사하며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 큰 누이의 삶이 조카들의 그것보다 더 애달팠을 것이다. 혹시라도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삼촌이 방문할 때 얘기하라는 말을 남기고 큰 외삼촌은 막 끓여 먹음직한 육개장을 한 술 뜨지도 못한 채 다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 하시는 거였다.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는 밥상마저 받지 않고 가시는 큰 외삼촌의 뒷모습,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렇게 따뜻한 남자 어른의 뒷모습은 평생 다시 보질 못 한 거 같다. 곱고 순한 마음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바로 이분이 아닐까 하는 그런 단 하나의 어른.


큰외삼촌이 총총 발걸음을 재촉해 시골로 돌아가시고 나면 길었던 여름 해도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고기가 실하게 담긴 육개장으로 기름졌던 저녁상을 물린 후, 그때부터가 바로 '화채 타임'이었다. 여름에 주로 먹게 되는 '화채'는 굳이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식의 '과일 칵테일' 인 걸까.


성인이 돼 직장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해 여름, 몇 기수 위 선배를 따라간 술집에서 난생처음 보게 된 음식이 하나 있었다. 아, 음식이라고 하면 맞는걸까? 넓고 큰 유리 보울에 국자와 함께 나온 그 음식과 안주 중간쯤의 정체는 이전까지는 보지도 듣지도, 그러니 먹어본 적은 더더욱 없었던 '과일 칵테일'였다. 색색의 과일이 달콤한 음료와 섞여서 마치 여러 종류의 보석들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색이며 맛이 환상적이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약간의 취기에  판단이 더 흐려져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날의 '과일 칵테일'에 담겨 있던 동그랗게 앙증맞은 수박이 어찌나 예뻤던지 먹기에도 아까울 정도였으니. 그 이전까지 모름지기 화채에 들어가는 수박이란 초등학생의 주먹반만 한 크기 정도는 되는 것이라 믿어왔기에 일종의 문화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물론 훗날 이 과일 칵테일의 정체가 정성스러움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임을 알게 됐을 때의 배신감과 허탈함도 상대적으로 크긴 했지만.


아무튼, 우리 엄마의 과일 칵테일,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수박화채'는 내가 보았던 그 화려하고 예쁜 '과일 칵테일' 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맛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 정체불명의 과일 칵테일과는 더더욱 비교불가였다. 커다란 대야에 얼음덩이와 함께 들어있던 수박을 반으로 크게 자른 후, 숟가락으로 최대한 크게 속을 퍼낸다음 양푼이에 담는다. 여기에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내던 사이다를 두 병쯤 콸, 콸 아낌없이 쏟아 부은 후, 엄마의 비밀 병기 미숫가루를 끼얹고 설탕도 한 두 스푼 넣은 다음 휘~휘저어준다. 아, 물론 아까 대야에 들어 있던 얼음덩이를 망치로 부셔 넣는 것도 빼놓으면 안 된다.

엄마 방식대로 만들어 본, 수박화채


이렇게 완성된 '수박화채'는 정말 세상의 온갖 표현을 끌어와도 묘사할 수 없는 특유의 맛이 있었다. 투박하지만 꽉 차있는 맛, 그 어마어마한 수박화채를 양은 대접에 한 그릇씩 배당받아 먹고 있으면 여름 밤하늘엔 어김없이 빛나는 별들이 나와 반짝이고는 했었다. 은하수를 따라 흐르는 숱한 별들 중 직녀성을 발견한 오빠의 한바탕 별자리 신화 강연이 어우러졌던 그 여름밤엔, 잠시 찌는 듯한 더위도 잊고 두런두런 얘기 꽃을 피우며 다가올 내일에 대한 희망의 불을 지펴 보기도 했었다. 간혹은 저 하늘에 빛나는 별들 중, 어느 한 별의 주인이 돼 머무르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려보며 생의 유한함에 눈물을 적시기도 했으리라.


성장기 아이에게 엄마의 레시피대로 '수박화채'를 해준 적이 있었다. 난해한 비주얼에 의심스러운 눈길을 주더니 마지못해 한 숟가락 뜬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미숫가루'는 왜 넣었냐고 반문을 했다. 수박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여서 아마도 수박은 그 어떤 첨가도 하지 않고, 그냥 수박 본연의 맛으로 먹는 것이 가장 좋은 거라 생각했을 테다. 하기야 아이는 내 어린 시절처럼 대청마루에 앉아 영롱한 별빛이 내려앉은 수박화채를 먹어본 일이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삼복의 마지막인 말복무렵엔 뜨끈한 육개장 한 그릇과 엄마식 '과일 칵테일' 아니, 수박화채로 더위에게 안녕을 고해야겠다.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름의 끝이면 달려와 주시던, 이제는 숱한 세월이 흘러 어느 한 별로 천천히 걸어 가고 있는 큰 외삼촌, 그분의 안녕까지 기원하면서. 그의 발길이 끝내 닿을 별의 위치가 엄마 옆자리 어디쯤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커버 이미지/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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