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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Sep 08. 2022

산더미처럼 쌓인 전을 보며 웃던 추석엔

세상에서 가장 큰 보름달이 떴다

                                                                                         

어릴 적엔 명절이 그렇게 싫었었다. 이 설명하기 힘든 희한한 감정은 대학에 입학할 무렵까지 한참 지속됐다. 또래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로부터 세뱃돈에 용돈에 이것저것 선물까지 받는 날이라며 손꼽아 그날만을 기다렸었지만, 나는 명절이 달력에서 사라졌으면 하고 바랄 때도 많았다. 웬만한 아이들이라면 좋아하고 기다리는 그 신나는 명절을, 나는 왜 그토록 진절머리 나게 싫어했을까.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워낙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유독 설이나 추석이 다가오면 나는 몸살이 나는 것이었다. 근육통도 근육통이지만, 펄펄 끓는 신열로 얼굴에 열꽃이 그득한 적도 허다했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몸이 이러다 보니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웬만한 일에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특히나 화를 잘 내지 않던 엄마도 이때만큼은 속이 상하셨던지 그 마음을 숨기지 않으셨던 거 같다.

"아이고, 혜원아 명절날 큰 집에 가면은 맛있는 게, 천지삐까리(굉장히 많다는 경상도 사투리) 일 텐데, 니는 와 꼭 명절만 되며는 이렇게 탈이 나고 그카노! 엄마가 속 상하대이"

 "엄마, 나도 와 이러는지 모르겠다. 근데 내 절대로 꾀병은 아니다 아이가! 머리 한번 짚어봐라, 열이 펄펄 끓잖아!"

실로 그랬다. 명절만 되면 이 모양이니 꾀병이라고 넘겨짚을 수도 있었겠지만 40도를 넘나드는 열이 오르니 엄마도 대체 왜 그런가, 매번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었다. 아주 한참 후에야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병증임을 알게 됐지만. 아무튼 이렇게 열이 끓는다고 해서 산 넘고 물 건너 버스를 타고 떠나는 시련의 큰 집행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었다. 몸살약을 며칠 지어먹으면서까지 반드시 큰 집에 가야만 했던 이유는 단 하나, 명절에만 만날 수 있는 '산해진미' 바로, 명절 음식 때문이었다.

당시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셋째 큰댁은 근동에서도 알아주는 부잣집이었고, 이에 걸맞게 워낙에 손이 크고 음식 솜씨도 좋았던 큰어머니는 명절 음식을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마련하곤 하셨었다. 당시로선 여늬 집에서 만나기 힘든 갈비찜이나 큼지막한 뼈를 오래 고아 뽀얗게 국물이 우러난 사골국이며 온갖 채소를 넣어 먹음직하게 무쳐낸 잡채 같은 것이 봄날의 꽃처럼 흐드러졌고, 송편에 약과에, 식혜와 고급진 유과까지! 하룻밤이라도 자고 오게 되는 날이면 먹다가 잠이 든다는 말이 무엇인지 증명될 정도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우리 삼 남매는 명절마다 엄마를 따라 이 셋째 큰댁으로 향했는데, 할머니가 살아계셨으니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지만, 엄마에겐 평소에 잘 챙겨 먹이지 못했던 기름진 음식을 자식들에게 배부르게 먹여보자는 심산이 더 컸었던 거 같다. 엄마는 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여기에 관해 물을 때면 매번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필시 내 추측이 백이면 백, 맞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손사래를 쳤으면서, 큰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엄마는 등대의 서치라이트처럼 반짝이는 눈길로 먹을 것을 찾아 어떻게든 우리 입에 넣어주려 애를 쓰셨다.

"아이고...약과 함 무봐라. 달재? 계피 향도 나고..참 맛있네"

"이따가 밥 묵을 때는 갈비 앞에 딱 앉아가, 고기 좀 마이 무라..알았재?"

엄마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사촌들만 수십 명인 가족들 중 내 자리가 갈비 앞이 될리는 만무했었다. 워낙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가장 모퉁이 그 끝에 앉아서 하얀 밥 위에 김치만 올려서 먹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다못해 전이라도 하나 집어 내 밥숟갈 위로 올리려면 몸을 일으켜 움직여서 가져와야 했기에 소심한 마음에 그조차도 잘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자꾸만 큰 소리로

"야들아, 찌짐(전) 좀 무봐라, 동태전이 맛있네. 돔배기(상어고기) 도 여, 있다"

엄마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때는...... 큰 소리와 함께 음식 접시를 우리 앞으로 옮겨 놓는 엄마가 너무 창피해서 어느 하루엔 울면서 밥을 먹다 말고는 도망쳐 나오기까지 했었으니까.

그렇게 열몇 번의 고통스러운(순전히 내 기준이다. 오빠와 동생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추석과 설이 지나고, 할머니와 큰아버지까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명절을 지내러 셋째 큰집엘 가지 않게 되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네 식구만이 모여 조촐하게 명절 음식을 해서 먹는 날들이 이어졌고, 오빠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는 오빠 식구가 거처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전까지 오빠네 세 식구와 함께 명절 상차림을 우리 식으로 차리게 되었다.

우리 식 상차림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찌짐, 전이었다. 엄마는 전에 한이라도 맺힌 사람인 양 부치고 또 부치는 것이었다. 엄마가 아끼는 낡고 푸른색의 플라스틱 채반이 매번 휘청거릴 정도였는데, 두부에서부터 고구마, 동그랑땡, 산적과 동태전에 오징어, 호박전까지 종류도 다양했고, 양은 더 어마어마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워낙에 먹을 음식만 해서 먹자는 실용주의자였던 올케언니가 한마디 할 수밖에.

"어무이, 이 많은 걸 누가 다 먹는다고 이렇게나 많이 부쳐요?"

"이까짓 꺼, 고마 한 이틀이믄 다 묵는다. 명절에나 전 부치니까는 마이들 무라"

엄마와 올케의 아웅다웅에 기분 좋게 웃으며, 그렇게 산을 이루다 못해 가끔씩 낙하하는 전을 엄마 곁에서 집어 먹다, 나는 어느샌가 몸살을 앓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는 아주 잠시지만 놀랬었다. 그리고 큰집에만 다녀오면 체하곤 했던 내가 엄마가 전을 부치는 동안 곁에서 야금야금 잘도 먹고 있는 모습마저 의아했다.

'이렇게나 잘 넘어간다고? 명절 음식이?'

깜짝 놀랄만한 산해진미에 더해, 그 오래 전의 시절에도 내로라하는 학력을 자랑하는 사촌들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어린 나는, 눈치가 너무도 빤~해 어른들이 아무리 얼르고 달래도 그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먹게라도 되는 날에는 소화가 될 리 만무했다. 그리고 명절에라도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이고 싶은 엄마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기엔 너무도 철이 없었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우리 식대로 푸짐한 음식을 만들어 여기저기 쟁여 놓고 차오르는 달을 보며 송편을 만들던 어느 추석을 기억한다. 넷이었던 식구가 오빠의 결혼으로 여섯에서 다시 일곱으로 늘고, 식구가 는 만큼 어쩐지 우리의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것 같은 느낌에 자꾸만 실~실 기분 좋은 웃음이 나던 그 하루를...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는 엄마의 타박에 "나 닮으면 필시 예쁠낀데, 뭔 걱정이고!" 라며 유쾌하게 대꾸하던 나는 더 이상 어깨가 축 처진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이제 시간의 계단을 차곡차곡 올라와 아래를 내려다보니 좋았던 때가 그렇지 않았던 때보다 더 많았다. 하여 기억의 회로는 상실보다 저장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온갖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김치만 먹던 어리디 어린 내가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기에. 그 아이의 푸른 눈망울을 잊지 않으려 손 모아 기도하는 오늘은 이토록 따스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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