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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Oct 24. 2022

노래도 예쁘고, 가을은 더 예쁘고

박강수의 가을은 참 예쁘다

매일 쓸만한 문장을 떠올리고 그 문장들을 조합해 글을  쓰는 데 사용되는 내 귀중한 책상은, 서재 북쪽 창가에 자리하고 있다. 창을 열면 아파트 단지 내 작은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데다, 무엇보다 북서쪽으로 난 창으로 드는 환상적인 저녁노을 때문에 딱히 글을 쓰거나 책을 읽지 않더라도 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일이 제법 많다. 봄엔 벚꽃 무지가 더없이 찬란했고 여름날엔 초록이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더니, 작금엔 매일매일 달라지는 나뭇잎들의 색에 마음을 빼앗겨 고개를 길게 빼고 내다보는 시간이 쌓여 간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은 조금 더 물이 들어 농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날엔 어떤 노래가 어울릴까? 선곡에 고민이 깊어진다. 빛이 나뭇잎에 가 닿아 생을 황홀하게 산란하는 하루에 딱 어울리는 노래, 너무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아서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는 가을의 물성에 가장 맞춤한 노래, 그리고 가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노래. 그런 노래는 무엇일까?

                                                                                         

 가을은 참 예쁘다

 하루하루가
 코스모스 바람을 친구라고 부르네
 가을은 참 예쁘다
 파란 하늘이
 너도 나도 하늘에 구름같이 흐르네
 조각조각 흰구름도 나를 반가워 새하얀 미소를 짓고
 그 소식 전해줄 한가로운 그대 얼굴은 해바라기
 나는 가을이 좋다
 낙엽 밟으니 사랑하는 사람들 단풍같이 물들어

 가을은 참 예쁘다
 파란 하늘이
 너도 나도 하늘에 구름같이 흐르네
 조각조각인 구름도 나를 반가워 새하얀 미소 짓고
 그 소식 전해줄 한가로운 그대 얼굴은 해바라기
 나는 가을이 좋다
 낙엽 밟으니
 사랑하는 사람들 단풍같이 물들어
 가을은 참 예쁘다
 하루하루가
 코스모스 바람을 친구라고 부르네 / 박강수 가을은 참 예쁘다 가사


누군가 내게 이 가을에 가장 듣기 좋은 노래를 추천해 달라고 말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노래를 권할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기에 계절의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절에 따라 듣고 싶은 노래도 현격하게 달라진다. 가을이 오기 시작하는 걸 느끼면 여름 더위에 잠시 주춤했던 서정과 낭만이 되살아남인지 노래를 신청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많아지고 그 사연과 신청곡도 굉장히 다양하고 폭이 넓어지게 된다.


사실, 우리나라 가요 중 가을 노래들을 들여다 보면 대부분은 멜로디가 느리고,  들으면서 사색을 하거나 잊고 있었던 일들을 회상케 하는 노랫말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그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가을 노래들 중에서 '가을은 참 예쁘다'는 실로 독특하다. 우선은 멜로디 자체가 예의 가을 노래들처럼 가라앉지 않고 명랑하다. 반복되지만 껄끄럽지 않은 가사는 시골의 꽃담처럼 단아하고 사랑스럽다. 하여, 왜 하필 이곡이냐 질문을 한다면 "노래가 참~ 예쁘잖아요, 가을처럼!"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으리라.


직업상 많은 가수들을 만났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많고 많은 라디오 음악방송의 그저 그런 작가로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겠지만,  유난히 사람의 표정을 그림 그리듯 기억하는 나는 가수 한 명, 한 명이 스튜디오로 들어올 때, 혹은 무대에 오르기 전 대기실에서 지었던 표정과 몸짓 말투가 지금까지도 기억난다. 친한 후배 작가는 이걸 두고 몹쓸 기억력이라 농담 삼아 얘기했지만, 이런 세밀한 기억력 덕에 지금도 글을 쓰는 자양분을 얻고 있으니 이젠 쓸만한 기억력으로 바꿔 불러야겠다.


게 중엔 자기가 부른 노래의 정서와 실제 모습 간의 간극이 너무 커서 실망을 안기는 사람도 가끔 있었지만, 간혹 자신의 노래를 꼭 닮은 가수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가수 박강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부른 노래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람. 한국적 포크를 떠올릴 때 거론되는 여자 가수들, 이를테면 양희은, 남궁옥분, 박인희나 전영의 계보를 잇는 티 없이 맑으면서도 정확한 가사 전달을 해내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고, 청바지에 편안한 차림으로 기타를 둘러맨 모습은 마치 동유럽 어디쯤을 유랑하며 산다는 근사한 집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던 몇 안 되는 가수이기도 했었고.


그런 그가 내가 맡았던 프로그램의 초대가수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의 대표곡인 '가을은 참 예쁘다' 덕분에 가을이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곤 했었는데, 그 바쁜 가운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 인생과, 노래와, 흘러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청취자와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는 동안 내내 그의 얼굴엔 마치 그려놓은 듯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보이는 라디오가 아니었는데도, 그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사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면서 진심을 다해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이 스튜디오 바깥에서도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의 노래 '가을은 참 예쁘다.'는 박강수의 목소리로 불려야만 완성이 되는 노래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에 쌓였던 일상의 찌꺼기들이 조용하고, 순정하게 분해되는 것만 같다. 노래의 소재로 쓰인 '단풍, 코스모스, 낙엽과 구름 그리고 해바라기'들을 따라,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로 자연스레 삶이 정화되는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담담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 같아서 노래를 다 듣고 나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이, 제대로 물든 단풍잎 하나가 마음의 우물에 고이 잠겨 있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노래가 곧 이 사람이구나.' 하는 기분 좋은 추측이 맞아떨어진 바로 그날, 가수 박강수와 담당 프로듀서 그리고 나는 가을 나무들이 훤히 보이는 어느 식당에 도란도란 마주 앉아 한 끼의 밥을 나누며 가을의 정취에 조용히 젖어 보기도 했다. 이렇게 가수의 시간이 오롯이 투영되고 이야기가 더해진 노래는 이제 예전에 내가 알던 그 노래가 아니다. 가수의 서사가 실리고 불러왔던 이력이 첨가되며 훨씬 더 풍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를 스튜디오에서 직접 만나고, 따스한 끼니를 나누고,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을 투명하게 공유했던 시간을 지나고 나니 이후 '가을은 참 예쁘다'를 들을 때면, 가수의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이 녹아 있는 노래야말로 가을보다 더 예쁜 것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매번 맞는 가을인데, 왠지 가을이면 기다리기라도 한 듯 우리 심장엔 잔 물결이 인다. 볕은 이토록 찬란하고, 매양 다르게 물들어가는 먼데 산을 바라보는 눈길에도 미세한 떨림이 감지 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얼른 신을 꿰 신고 가벼운 산책을 나서며 이 노래 '가을은 예쁘다'를 몇 번이고 들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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