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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Dec 24. 2020

크리스마스엔 행복을 부르는 국물 자작 불고기

이럴 땐 이런 음식/슬픔의 완충이 필요할 때

코로나 시대, 주부들의 밥상 차리기는 전투에 가깝다. 돌  돌 밥, 이러다 정말 돌아버리겠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이제 기나긴 겨울방학이 차례로 시작되니 이런 고민은 더 가중될 테고.


대부분의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는 가상한 남편을 뒀고 아이를 서울로 올려 보낸 지 오래인 나는, 이런 전투에서 이미 해방된 사람인지라 종종 이웃들의 부러움을 사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혼자 먹기 위해 차리는 밥상은 온통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간혹 그런 전투라도 치르고 싶은 내 마음을 말이다. 오늘은 특히  크리스마스이브이니.


크리스마스이브엔 국물 자작 불고기.


친하게 지내는 동네의 한 동생이, 아이가 너무 고기를 안 먹어서 큰 일이라며 오늘 저녁엔 불고기를  정성껏 해서 억지로라도 먹여야겠다는 말을 한다. 평소에도 입이 짧아서 걱정을 끼치는 아이이긴 하다.

"불고기 할 때 국물 좀 자작하게 해서 시금치 한 줌 넣어봐. 먹기 직전에 넣으면 돼"

내 이 한마디에 사뭇 놀라는 눈치다. 그래,  불고기에 버섯이나 양파는 넣어봤어도 시금치는 생소하겠지. 이맘때의 시금치는 단맛이 강해서 생으로 먹어도 될 만큼인데, 엄마는 이 시금치로 풍미를 더한 기가 막힌 국물 자작 불고기를 뚝딱 만들어 내고는 하셨다. 이 시금치가 들어간 국물 자작 불고기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먹으면 더 맛있다. 왜 하필 크리스마스이브냐고? 거기에는 지난한 우리 가족사의 일부가 살아있기 때문에 특히 그러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엄마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반찬으로 평소에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불고기를 해주시곤 했다. 


또래였던 옆집 H네는 아버지가 메리야스 공장(혹은 양말 공장)의 상무쯤 되는 높은 직급인 데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또한 어마어마해서 우리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그 집의 밥상에 어떤 음식이 올라가는지 눈을 감아도 짐작하고 남았음이다. 그 집에선 부를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고기반찬을 자주 해 먹었던 거 같다. 그중에서도 달큼한 냄새를 뭉근하게도 오래 풍기는 불고기를 자주 해 먹었는데, 돼지고기와 닭고기 알레르기가 너무 심해서 입에도 대지 못하던 나도, 그 불고기 냄새만큼은 참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우리도 불고기 좀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노!"


"맞재 언니야."


어린 나와 그보다 더 어렸던 동생이었기에 그냥 속절없이 엄마가 듣고 있는 데도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우리 집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 불고기 냄새의 황홀함은 어린 우리를 자꾸만 칭얼거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단 고기 그것도 소고기는 그 시절, 아무리  사는 집이라 할지라도 1년에 단 몇 번 먹을 수 있었던 너무도 귀한 음식이었기에 단백질 섭취가 많이 모자랐던 우리 삼 남매는 자주 아팠다.


그 아픔은 수시로 면역에 흠집을 내고 성장을 더디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또래보다 왜소했고, 동생은 자주 기절을 할 정도로 영양이 부족했다. 새하얀 얼굴에 깡마른 미소년이었던 사춘기의 오빠에게도 고기의 단백질은 너무 필요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의 손에는 한 눈에도 큼지막한 정체불명의 봉투가 들려있었다.


"엄마, 그기 뭔데?"


"이거? 이거 맛있는 기지. 우리 오늘 고기 실~컷 묵 재이!"


슬픔의 완충이 필요할 때는 맛있는 걸 해 먹어요.


동네 정육점 사장님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분이었다. 딸 쌍둥이를 두고 있어서 우리 고향 말로 '쌍 아바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고. 엄마는, 쌍디 아바이가 별 크지도 않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오늘 집에 누구 귀한 손님이라도 오시는 갑심더."라고 물을 만큼 넉넉한 양의 소불고기 거리를 끊어오신 거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는 옆집 H네 집이나 골목 맨 끝에 있던 이층 양옥집 정도는 돼야 사 먹을 수 있는 양의 소고기인데, 울 엄마가 외상도 아닌 현금을 주고 사 오신 건 그 정육점 사장님에게도 하나의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엄마는 서둘러 불고기를 재우기 시작하셨다. 커다란 양은 통을 꺼내고 설탕과 간장을 비롯한 양념거리들을 부뚜막에 차례대로 올려놓으신다. 선홍빛의 소고기에 갖은양념을 해서 마디 굵은 손으로 조물조물 몇 번 해주면 일단 고기 재우기는 완성이다. 엄마의 불고기 양념을 한 번 떠올려본다.


엄마의 레시피/양파즙, 설탕, 양조간장, 후추, 다진 마늘 듬뿍.. 끝


별것이 들어가지 않는다. 가끔 사과농사를 지으셨던 큰외삼촌이 가져다주시는 사과 중에 멍이 들고 썩기 시작하는 것이 생기면 그걸 강판에 갈아서 좀 넣으신 적이 있기는 하지만, 진짜 있는 념으로 계량이고 뭐고 없이 눈대중, 손대중으로 대충대충 버무리신다. 하지만 이 대충이 그냥 대충이 아님을 한참 뒤 큰 후에야 알게 됐는데,  음식을 할 때 엄마 인중의 움직임이 남달라서이다. 집중해서 뾰족해지는 입술과 더불어 빠르게 몸짓을 따라 움직이는 인중. 얼마나 이 음식에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던가.

보기에 따라서는 엉성할 수도 있는 엄마의 레시피와 내 레시피를 한 번 비교해 본다.


내 레시피/배즙과 양파즙, 꿀, 키위 간 것 설탕 아주 조금, 청주, 매실청, 후추, 마늘, 양조간장, 맛간장. 생강즙 조금.

그리고 자작하게 끓여 내기 위해 마련하는 육수는 멸치와 다시마 등속을 끓여낸 진한 육수(엄마와 같음)

그렇다면 맛은? 당연히 엄마 승!



크리스마스이브가 우리에겐 몹시도 특별했기에


어느 해 크리스마스이브,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먹었던 이 특별한 불고기의 맛은 진짜 잊어지지가 않는 그 맛이다. 좋은 음식으로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맘 반, 이런 특별한 날에라도 든든히 먹이고 싶은 맘 또 반, 거기에 이젠 이렇게라도 고기를 먹일 수 있다는 자족과 감사의 맘이 덤으로 얹혔을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재워진 불고기를 속이 깊고 밑이 단단한 냄비에 담고 양파와 대파를 숭덩숭덩 썰어서 넣은 다음 육수를 한 바퀴 두른다. 아! 물에 미리 불려 놓은 당면도 이때 함께 넣는다.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거품을 걷어내면서 때를 기다린다. 여기의 때는 바로 엄마의 비법 '시금치!'를 넣어야 할 때이다. 반드시 불에서 꺼내기 직전에 넣어야 한다.


연탄불에서 한소끔 끓여내 온 국물 자작 불고기는, 바로 상 위로 올려 뜨끈할 때 먹어야 한다. 이날만큼은 잡곡밥이 아닌 흰쌀밥과 함께 먹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천국의 맛이 있다면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래 그 맛을 느끼기 위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국물이 넉넉했기에 항상 조금은 남게 되는 데, 이 남은 국물로는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밥을 비벼 김장 김치를 얹어 먹었다. 이 맛 또한 별미 중의 별미였음이다.

사랑하는 이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슬픔도 허기도 음식으로 메우고자 했던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 날이 아버지 기일이다 보니 이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의 국물 자작 불고기 자연스레 차오르는 슬픔을 맛있는 음식으로 희석해보려는 우리 엄마의 의도가 숨어있기도 했을 테다. 


나쁜 기억들은 매일 조금씩 자라나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려 하기 때문에 잊으려고 애쓴다고 잊히는  아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가족 모두가 겪는 거대한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엄마는 그렇게도 삼 남매 삼시 세 끼를 챙겨 먹이는 걸 일종의 과업처럼 행하고 계셨으니. '당신 자식들, 나 혼자서도 이렇게 제대로 거둬 먹이고 있으니 그곳에서 편히 쉬고 있으라'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당부가 담긴 음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이브 저녁으로 시절 음식처럼 먹게 되면서, 국물 자작 불고기라는 완충지대가 제대로 역할을 했음일까? 우리는 조금씩 그렇게 아버지의 부재를 잊어가면서 다가오는 새로운 일상들에 점차 몰입하게 되었다.


슬픔의 완충지대로 음식의 영역을 택한 엄마의 선택은 탁월했던 것처럼 보인다. 허기가 지면 누구든 판단과 사리분별에 종종 미스가 생기고, 괜한 것에 트집을 잡거나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이럴 때 몸의 허기를 달래고, 몸의 허기가 불러오는 마음의 허전함까지 자연스레 음식으로 채우고자 애썼던 내 어머니의 지혜는 지금 생각해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변질되지 않는 추억의 맛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무렵이었던 거 같다. 크리스마스이브였고, 귀한 눈이 내렸고 날이 몹시도 추웠다. 뭔가 특별하면서도 따뜻한 음식을 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다, 갑자기 크리스마스이브의 국물 자작 불고기가 떠올라  먹었던 적이 있다. 아이는 고기를 워낙 좋아하던 터라 방방 뛰면서 "엄마, 엄마! 눈이 오면 이렇게 국물 있는 불고기 먹는 거야?" 라면서 좋아했다.


아이의 밥그릇 위에 고기 한 점과 시금치를 올려주는 데, 기억 속에 숨어 지내던 그 특유의 큼한 맛이 새록새록 떠오르더니, 코 끝에 스쳐가던 겨울바람과 네 식구 얼굴에 한 없이 피어오르던 웃음과, 입안 가득 퍼지던 시금치의 단향이 몽땅 다 느껴지고 보이는  아닌가.


이렇게 추억에 새겨진 음식의 풍미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질되지 않는다.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더 행복한 곳으로 인도해 준다. 어떤 감정이든 녹여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밝은 빛으로 채색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엄마의 음식을 떠올리고 그 맛을 재현하려고 애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리 귀했던 소고기를 이젠 언제든 먹고 싶을 때 맘껏 먹을 수 있게 됐지만, 육식을 거의 하지 않게 된 이후 이 그리운 국물 자작 불고기가 연탄 불 위에서 자글자글 끓어오르던 소리가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엄마한테는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먹지 않아도 기꺼이  국물 자작 불고기를 계속 요리할 것이다. 그리고  슬픔마저 잊게 만든 힐링푸드의 놀라운 힘을 낱낱이 전해주며 함께 기운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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