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린혜원 Nov 07. 2020

입동 무렵엔 호박범벅을 먹어야지

이럴 땐 이런 음식/ 엄마! 이거 먹고 힘낼게요.

11월 들어 그 해 첫얼음이 얼고, 바람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가는 날이 시작된다 싶으면, 엄마는 늙은 호박 서너 개를 숭덩숭덩 잘라 호박범벅을 끓여내고는 하셨다. 다른 지방에서는 조금 묽게 해서 호박죽으로 많이 먹지만 경상도에선 콩 등속이 넉넉히 들어가고 찹쌀가루도 양껏 넣어 걸쭉하게 끓여내는 범벅 스타일을 선호한다.

 

어린 시절 우리가 살던 집은 윗채와 아랫채의 대문이 따로 있을 정도로 꽤 큰 기와집이었는데, 그 규모에 비해 구성은 이만저만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 제일은 그 넓은 마루에 문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한옥이라고는 해도, 마루를 통해 방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을 막아줄 문이 없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집으로서는 꽤나 큰 결격사유였다. 그래서 다른 계절에 비해 유독 겨울을 잘 버텨내는 것이 우리 가족에겐 큰 숙제이기도 했다.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던지는 몰라도, 엄마는 없는 살림에도 겨울 먹거리에 신경을 쓰셨던 거 같다. 호박범벅도 그중 하나이고. 어쩌면 입동에 들면서 길고도 추울 겨울을 대비하는 음식, 첫 번째이었으리라.


시골 사는 외할머니가 가져다주셨는지 아니면 늘 무엇인가를 나누어주고는 했던, 부자이면서 인심마저 좋았던 이웃 아주머니가 주셨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널따란 마루 한 구석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실한 늙은 호박이 예의 그 매운바람을 맞으며 우리와 함께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찍 하늘로 떠나버린 아버지 자리를 대신하느라 하루 종일 밖에서 장사를 하고 돌아온 엄마는 그 와중에도 얼마나 체력이 좋으셨던지, 쉴 새도 없이 쌓여 있는 호박 중에 제일 실하다 싶은 걸 고르며 호박범벅을 끓일 채비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치 수박을 선별할 때처럼 늙은 호박의 겉면이 단단한지 주먹을 꼭 쥐고 두드려보는 것으로 말이다.


아침에 일 나가며 담가 놓았던 양대며 팥들을 물에 씻어 잘 건져 둔 다음, 시장 방앗간에 가서 갈아 온 찹쌀가루를 준비하고, 고구마를 먹기 좋은 크기로 어 놓는다. 그리고는 찹쌀가루의 반쯤을 반죽해 새알심을 만들어 둔다. 여기까지는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호박범벅 만들기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 엄마의 호박범벅은 뭔가 전체적으로 예사롭지가 않았던 거 같다. 일단은 그 양부터 다른 집의 호박범벅들을 압도한다. 워낙에 손이 크기도 하셨지만, 시댁 조카들이 도시 유학차 무시로 거주하던  집이었기에 대식구들 식사를 거두던 엄마에게는 오늘 먹을 만큼만, 혹은 우리 식구 먹을 만큼만이라는 계량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뭐든 많이 풍성하게 하는 스케일은 호박범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제일 큰 사이즈의 양은솥이 넘칠 정도로 끓여낸 엄마의 호박범벅은 말 그대로 온 동네의 한 끼 식사를 책임질 만큼 그 양이 넉넉했었다.

우리 집에서 호박범벅을 끓인다는 소문이 나면, 동네 다른 집들에서는 저녁을 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1970년대 초쯤엔 동네에 그렇게 거지들이 많이 돌아다녔었다. 우리가 살았던 곳은 대도시였고, 그중에서도 꽤나 번화한 동네로 손꼽혔던 곳이지만, 전쟁 후 한참이 흘렀어도 머물 곳 없이 동냥을 하며 걸인 행세를 하는 사람이 한, 둘은 꼭 있었는데, 엄마의 호박범벅은 이 거지들의 발걸음마저  멈춰 세우곤 했다. 요즘처럼 문단속을 하지도 않고 지냈던 시절이다 보니, 삐거덕 거리는 나무 대문을 열고 "주이소~"라는 말이 여사로 들려왔었는, 그중에서도 만두를 하는 날과, 호박범벅을 하는 날이면 빈도가 조금 높아지고는 했었다.


엄마는 번도 그들을 내친 적이 없으셨다. 어쩌면 동네가 먹고도 남을 호박범벅에는 거지들의

숫자까지 셈해 넣으신 건지도 모르겠다. 소반을 펴고 양푼이 한가득 호박범벅을 담고, 김치도 한 사발 가지런히 놓은 상을 받는 거지들이라니!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진짜 상상할 수도 없는 그림 아니겠는가!

한 끼 밥을 얻어먹으려 동냥을 다니는 거지도 없으려니와, 네 것, 내 것 없이 또한 낯선 이에게 경계도 없이 대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다.


엄마의 호박범벅은 많이 달지도 않으면서 무언가 깊은 단맛이 나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꼭 따뜻하게 먹지 않더라도 너끈히 한 그릇을 비워낼 수 있는 맛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맛의 비밀을 아이를 낳은 후에야 엄마에게 들을 수가 있었다. 물론 그 비밀이란 게 너무 예상 밖이어서 조금 허탈하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엄마는 설탕을 아끼기 위해서 설탕 대체제로 쓰이던 '삼성당' 이란 것을 더 많이 넣으셨던 것이다. 요즘은 '뉴슈가'란 이름으로 나오던데, 잘 쓰이지는 않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사람 입맛이란 게 얼마나 묘한지 그 맛을 내기 위해서는 엄마의 비법을 아니 쓸 수가 없는 거다. 놀라워라, 엄마와의 추억은 어릴 때 먹었던 음식의 맛으로 기억된다고 하더니.... 나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음이다.


호박범벅을 먹을 때 가장 큰 재미는 찹쌀로 만든 새알심을 건져먹는 것이다. 찹쌀이 비싸기 때문에 아무리 손이 큰 우리 엄마라고 할지라도 새알심을 아낌없이 넣는 건 무리가 있었던가 보다. 큰 양푼이에 가득 담긴 호박범벅 한 그릇에 새알심은 고작 서너 개쯤 들어 있을 때가 허다했는데, 새알심은 조금밖에 없고 고구마만 잔뜩 들어 있던 호박범벅이 먹기 싫다며 앙탈을 부린 적도 있었다.


그마저도 더 여유가 없던 시절엔 찹쌀이 아닌 밀가루로 작은 수제비를 떠서 호박범벅에 넣고는 했는데....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졌어도 단 한해도, 입동 무렵의 호박범벅을 빠트린 적은 없으셨던 거 같다. 호박범벅을 끓여 온 식구를 먹이고, 동네 사람들과 지나가는 거지들까지 챙김으로써 우리 엄마는 엄동설한으로 다가 올 

겨울준비를 시작했던 것이었나 보다.



바람을 막아줄 마루 문도 하나 없던 집에, 그래서  황소바람이 아무런 방어장치 없이 문풍지 사이를 서서히 뚫고 들어와 누구랄 것도 없이 몸을 달~달 떨게 되던 그 집에, 그래도 사람 사는 온기는 끊이질 않았던 거 같다.


호박범벅을 끓이는 동안 내내 퍼지던 구수하고도 들큰한 냄새와, 넘치도록 담긴 호박범벅과, 김치와 무말랭이 무침을 담은 밥상과, 벌써 발이 시려 꺼내 덮었던 장미 그림이 크게 그려진 조악한 밍크 이불과, 늦게 돌아오는 사촌오빠를 위해 따로 담아놓았던 찌그러진 찬합과, 잎이 다 떨어진 감나무 가지사이로 불어대던 바람소리며 거지들이 숟가락으로 그릇을 긁어대던 소리까지,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이 눈에, 귀에 지금까지도 이토록 생생하니.



엄마는 돌아가시기 바로 전해까지도 호박범벅을 끓여서 집으로 들고 오셨다. 네 것에는 새알심을 특별히 많이 넣었다면서 어서 많이 먹으라고, 그래야 추위도 이기고 한 겨울 날 수 있는 거라고 변함없는 레퍼토리를 읊으셨는데, 나는 또 그게 듣기 싫어 이런 거 이제 힘든데 좀 그만하라고 타박 아닌 타박을 했었다.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은 엄마의 손맛에 안도했었지만,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세상 모든 이치란 왜 지난 다음에 깨달을 수 있게끔 설계된 것인지 야속하다. 아무튼 이젠 어디서도 그 맛의 호박범벅을 맛볼 수가 없음에 코 끝이 시큰해온다.


며칠 전 친정 외숙모가 끓인 호박범벅 한 그릇이, 동생을 통해 고맙게도 내게까지 전해졌다. 분명 솜씨를 자랑하는 외숙모가 끓였음에도 엄마의 그 맛이 아니어서 한 숟갈을 뜨고는 목이 매어 꺽꺽댔다. 두해 전쯤 엄마의 호박범벅을 떠올리며 갖은 솜씨를 발휘해 끓여본 나의 호박범벅도 그 맛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고... 엄마는 대체 삼성당 말고 또 무엇을 넣었길래 그렇게 미각을 일시에 기립시키는 맛을 낼 수 있었을까? 해마다 맞을 입동에 변함없의문을 품으며, 호박범벅 앞에 두고는 아이처럼 난, 이렇게 얘기하겠지.


"엄마! 이거 먹고 힘낼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