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린혜원 Feb 03. 2021

늙은 호박전 한 넙띠기

이럴 땐, 이런 음식/호박전으로 쓰는 입춘첩

입춘 즈 2월 밤의 맛, 늙은 호박전


동네 대형은행 모퉁이를 돌아들면 1층에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프랜차이즈 김밥집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바로 그 앞  가로수 아래, 갖가지 푸성귀를 가져다 파는 머니가 운영하는 노점이 자리하고 있다. 보기보다 다양한 종류를 구비해 놓은 데다, 워낙 손질을 꼼꼼하게  물건들을 파시기에 은근히 인기가 많은 노점이다.


며칠 전 이 노점에,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노란 뭉치가 등장했다. 늙은 호박을 채 썬 것이었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입춘에 든 이맘때 먹어야 제격인, 2월의 밤 맛이기 때문이다. 특히 내게는.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그 옛날 우리 집엔, 항상 늙은 호박이 많이 쌓여 있었다. 엄마가 식재료로 늙은 호박을 특별히 애정 했을 수도 있고, 시골 외할머니가 혼자 아이들 거두며 사는 당신 딸이 애처로워서 뭐라도 도움이 돼라 챙겨 보낸 덕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빈한했던 살림살이 중에도 누렇게 잘 익은 호박들이 마루에 쌓여 있는 걸 볼 때면 이 참 풍성해 곤 했었다. 그렇게 마루에 쌓아둔 늙은 호박 가장 실한 놈은 호박범벅용으로 간택이 돼 제 소임을 다했고, 게 중  조금 시들시들하다 싶은 것들은 드디어 이즈음의 호박전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게 된다.


엄마는 살집이 좀 있는 편이셨다. 음식을 앞에 두면 입이 워낙 달아서, 세상에 맛없는 음식이 어디 있냐고 반문을 하시곤 했다. 그런 천성은 역시 타고나는 것인가 보다. 두툼하면서도 넙적한 손(재주 많은 손이라 자칭하시곤 했다)으로 만드는 음식 하나하나엔, 당신 말대로 재료 본연의 맛도 살리면서 집 나간 입맛도 돌아오게 하는 놀라움이 들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 평범한 호박전 하나에도 당신이 있는 최대치의 심혈을 기울이시는 게 한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그냥 대충 재료들을 버무려 부쳐내는 것이 아니었다. 늙은 호박전은 다른 전들과 부치는 방법이 많이 다르다. 간단하고 쉬운 듯 하나 , 번듯하게 부쳐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에 말이다.


엄마의 늙은 호박전 레시피


고들어 있는 호박 하나를 골라 껍질은 최대한 얇게 벗겨낸다. 속이 알차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공정을 하는 동안엔 엄마의 눈빛은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형형한 눈빛에 가까워진다. 워낙 늙은 호박의 껍질이 두껍기 때문에 자칫 손을 다칠 수도 있어서 더 조심스러운 칼질이다.


그렇게 몇 토막의 호박 속살을 얻어낸 후, 또 다른 칼질 신공을 부리며 최대한 호박을 얇게 채 썬다. 요즘처럼 성능도 다양한 채칼이 있었다면 이 과정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예전에야 어디 그랬나. 하지만 신묘한 엄마의 손은 거침없이 일정한 두께로 잘린 호박채를 만들어내곤 했었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말이다.


주황빛을 띄는 호박채가 마련되면 이제 이를 버무려야 한다.  요즘 레시피들을 보면 전분가루로 부치라는 당부가 많던데, 엄마의 호박전에는 밀가루와 찹쌀가루가 6:4의 비율로 들어가는 것으로 기억한다. 채 썬 누런 호박에다 이 가루를 넣은 다음, 가루가 서로 엉길 정도로 아주 약간의 물과 소금 한 꼬집을 넣는다. 귀한 설탕 대신 삼성당을 챙겨 넣는 것도 빼먹지 않아야 한다.


요즘, 호박전을 부치면서 이 삼성당(뉴슈가) 대신 설탕을 넣어봤지만, 맛은 역시나였다. 각인돼 있는 맛의 기원은 쉬 변하지 않는 법이다. 이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잘 구워내면 된다. 겉은 바싹하지만 속은 촉촉한 '겉바속촉'의 원조! 늙은 호박전이다.


다른 부침개들은 최대한 기름을 많이 둘러 구워내곤 하던 엄마였지만. 이 늙은 호박전만큼은 최대한 기름기를 자제하셨었다. 자칫 기름기가 너무 스며들어 호박의 과육을 허물 거리게도 할 수 있음이었다. 아마 엄마도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이런 조리법을 발견하게 된 것이긴 하겠지만, 어린 시절 늙은 호박전을 부치는 일련의 과정 동안 펼쳐졌던 엄마의 그 능수능란한 손길은, 마치 한 바탕의 마술쇼를 보는 듯해서 자주 놀라곤 했던 기억이 있다.


늙은 호박전과 함께 지나가는 2월의 밤


늙은 호박전은 무 동치미와 함께 먹는다. 발효할 대로 발효한 무 동치미의 맛은 사이다 저리 가라다. 크게 한 입을 베어 문 호박전 사이사이로 시원하고도 톡 쏘는 맛의 동치미 국물이 들어가면 가히 환상의 궁합을 이룬다.  마지막에 썬 무 한 조각으로 깨끗이 마무리하면 아직 한기가 남아 있는 그 밤도 너무 따뜻해지는 것이다.


늙은 호박전만 먹으면 아쉬운 밤이지 않겠는가. 곁들여서 군 밤이나, 찐 고구마도 가끔은 앙상블을 이뤘다. 이미 동지가 지나 밤이 점점 짧아져 가지만 늙은 호박 부침개를 먹는 밤은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말수 없는 네 식구가 모여 앉아 붉은색을 뽐내던 14인치 tv를 보며, 도란도란 나누던 무언의 시간들. 다시 올 수 없는 따스한 풍경였다.


오빠는 본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얘기, 나는 책 이야기, 동생은 막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수학 얘기. 비록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끊기는 대화, 그 행간에 숨어 있던 보드랍고 톡톡한 느낌은 문득문득 떠올릴 때마다 사무치게 그리움, 부인할 수 없다. 


아주  가끔은 저마다 새봄에 일어날 어떤 희망찬 일들을 꺼내놓기도 했다. 대부분 희망에만 머물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온갖 수식어들을 동원해 다가올 날들, 그 촘촘한 시간의 밀도를 다정하게  형언해보는 것이다.


"올 해는 좋은 시를 많이 쓰고 책도 더 열심히 읽을라 칸다."


입에 발린 말일지언정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소망을 꺼내 놓아야 하는데, 내 기원은 영~방향이 다른 항상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타박도 없이 호박전을 잘라주며 엄마는 단 한 마디, 이  말씀만 건넬 .


 "마이 무라, 묵어야 시도 쓰고, 책도 읽고 그카지."


언젠가부터 공부에 손을 놓고, 문학에 미치도록 집중하고 있단 걸 엄마가 왜 몰랐겠는가. 아마 묵묵한 지지와 응원, 그것만이 당신의 고집스러운 맏딸에겐 한 줄기 빛이 될 걸 은연중 아셨을 테다.


늙은 호박전 한 넙띠기로 쓰는 입춘첩


봄을 기다리며 먹었던 늙은 호박전. 왠지 새봄엔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그래서 어느 순간 천덕꾸러기가 될지도 모를 늙은 호박을,  빨리 먹어치워야 하는 의무감이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에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늘~ 늦겨울부터 새 봄에 든다는 입춘 무렵까지 유독 이 늙은 호박전을 더 많이 먹었던 거 같기는 하다. 호박전을 나눠 먹으며 짧게 새봄의 다짐도 얘기하고, 오순도순 순간의 가족다운 정을 나누고, 그동안 무심했던 일상사의 안부도 챙기면서 그렇게.


그래서 잘 부쳐진 호박전 한 넙띠기에는 고단하고도 긴긴 겨울을 잘 버텨냈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다가오는 새봄에 대한 소중한 기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늙은 호박전 한 *넙띠기는 단순한 전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염원이 깃든 입춘첩이었던 것이다. 새 봄의 무사 안녕을 글씨에 담아 한 걸음 성큼 따스한 기운에 다가서려는 의지로 꾹꾹 눌러쓴, 바로 그 입춘첩.


*넙띠기는 우리 경상도 지역에서, 전을 헤아릴 때 쓰는 단위 말이다.

봄비에 기다렸다는 듯, 매화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틀 전, 봄을 재촉하려는 건지 보슬비가 내리더니 단지 안의 매화들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아마 한 차례 입춘 추위가 몰려와 잠시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 지만, 봄이 바로 등 뒤에 와 있음을 직감한다. 이토록 힘들었던 겨울이었어도 지나오니 어김없이 봄이다. 늙은 호박전 서너 넙띠기쯤 더 구워 먹으며 기다리고 있다 보면, 봄 아기씨를 닮은 훈풍 한 자락이 우리 발 끝을 슬며시 간질이지 않겠나. 기다림이 깊을수록 봄의 향내 또한, 어지럽도록 진할 것이고.

이전 13화 크리스마스엔 행복을 부르는 국물 자작 불고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