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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Mar 25. 2022

집 나간 딸을 위한 생일 선물, 쑥떡

내게 3월은 푸르고 너른 들녘의 계절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길고 추웠던 겨울을 지나 봄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를 가장 빨리 보내는 곳이 들녘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도심 인근에서도 얼마든지 이 봄의 들녘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 하여 겨울을 잘 견뎌내 속살이 통통해진 봄나물들을 다퉈 캐는 아낙네들의 흥겨운 어깨춤을 보는 것도 이즈음에만 볼 수 있는 귀하고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물론 내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는 주로 지금은 고층아파트 촌으로 변해버린 범어 뒷산(대구의 강남이 돼 버렸다)이나 신천둔치 인근으로 봄나물을 캐러 가곤 하셨는데, 여기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린다 싶으면 본인의 보물창고이자 고향인 심심산골 매여골(외가)로 발길을 돌리기도 하셨다. 엄마의 고향은 대구라는 큰 도시의 바로 인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산골에 자리해 있었는데, 그곳은 골이 깊은 만큼 모든 것이 놀라우리만치 청정했다. 마을을 이룬 사람들과, 들녘에 흐드러진 꽃, 풀과 나물들, 하다못해 집집을 지키고 있는 개들조차 때라곤 묻지 않은 순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남편을 여읜 후, 먹고사느라 도통 여유가 없었던 엄마는 자신의 고향에서 가져온 예의 청정함을 조금씩 잃어가는 듯했지만 놀랍고 신기하게도 새봄이 오면 한 번씩 그곳의 들녘을 찾음으로, 시들어가는 몸을 재정비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곳을 다녀온 엄마는 자신이 캐온 쑥과, 달래와, 냉이처럼 싱그럽고 생기 있어 보였으므로 나는 문지방을 넘는 3월의 꽃샘바람을 언제부턴가 손꼽아 기다리게 됐던 것이다.


엄마의 뒷모습은 왠지 늘 굽어보였다. 빈한한 살림살이와 자식들을 건사하는 일은, 강하고 당찬 엄마의 성정으로도 대부분 벅찬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겨울의 막바지에 들면 낡고 두터운 스웨터 아래 한껏 웅크러진 몸을 숨긴 채 가난의 정점에서 혼자 들썩이는 날들이 많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어느 날은 갈 곳을 잃어버린 커다란 공벌레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봄이란 엄마에게도 우리 삼 남매에게도 희망이고 구원이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약속을 알리는 계절이었던가 보다.

웅크렸던 모든 것들이 기지개를 켜는 축복의 시간에, 엄마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큰 포효를 하며 봄이 내뿜는 따스한 시간으로 나갈 준비를 하곤 했었다.


매여골로의 행차는 대부분 이모들이 동행했었다. 타고난 성정이 몹시도 부지런한 엄마의 자매들은, 큰 언니인 엄마를 기점으로 잘 뭉치고 우애도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버스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고, 다시 정류장으로 마중 나온 외삼촌의 경운기에 올라 들길을 덜커덩 덜커덩, 한 시간여 더 달려간 그 들녘에서 맞았던 엄마와 이모들의 봄날은, 추측해보건대 지천인 산수유꽃보다 더 황홀하지 않았을까?



3월 들녘에서 직접 캔 쑥으로 만든 떡은 향이 아주 진했다. 시장 어귀 소쿠리에 수북하게 담긴 쑥들과는  향 자체가 달랐다.  씹을 때마다 진하디 진한 쑥 향은 온몸에 핏줄을 타고 번져, 나는 매번 가보지도 못한 어느 광활한 언덕에 누워 나비잠을 자는 소녀가 되곤 했었다. 이런 쑥을 캐온 날이면 언제 준비해뒀는지 쌀가루와 쑥을 툭툭 버무려, 쑥 버무리를 하거나 이튿날 콩고물에 꾹꾹 눌러 먹는 쑥떡을 만들곤 했다 참 엽렵했던 우리 엄마는. 그리곤 무심하게 꼭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이다.


"내가 와, 외갓집까지 가가 쑥 캐왔는지 아나?

우리 혜워이 생일이라꼬, 니 좋아하는 떡 해줄라꼬

캐온 기다. 봄쑥은 약이라 안 카나, 약이라 생각하고 마이 묵고 건강하게, 잘 살아야 된대~~이"


그랬다. 엄마의 쑥떡은 3월에 태어난 맏딸을 위한, 생일떡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도 지금처럼 케이크까지는 아니더라도 생일이면 카스텔라 정도는 자르는 집이 허다했지만, 가난했던 엄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 직접 캔 쑥으로 만든 떡으로 자식의 을 축복했던 것이다.

그렇게 쑥을 캐는 봄이 한 번씩 더해질 때마다, 지나간 해들보다는 조금 더, 또 조금 더 나아지는 살림살이를 기원하며 굽은 등을 펴고 아이들이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긴 시간에 감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물을 넘기고는 엄마의 생일 쑥떡을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오랜 장사로 얻은 관절염 때문에 쑥 캐기가 힘들어지면서 시장에서 사 온 쑥떡이 생일 상에 올라오기 시작했고,  3월  매여골의 진한 향기도 조금씩 기억에서 옅어지고 있었는데 그 후로  한번 그 쑥떡을 다시 생일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다. 오라버니가 결혼 날짜를 정하고 살던 집 전체를 리모델링하게 돼, 식구들이 두 달 정도 뿔뿔이 흩어져 생활했던 그해의 봄이었다. 나는 독신인 대학 은사 선생님 댁에서 잠시 거처하며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워낙 바쁘고 정신이 없던 시기였던지라 생일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막 퇴근을 하려던 참에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마이 바뿌재? 니 내일 범어동 올 수 있나? 생일 아이가.."


생일, 이란 단어가 그렇게 뭉클한 것인지 그때 처음 느꼈다. 아주 잠시지만 집을 떠나 있는 가운데 들은 말이어서 더 그랬을 걸로 짐작한다.


"생일은 무슨, 집 공사에 오빠야 결혼 준비한다고 정신없을낀데, 개안타 엄마"


"뭐  마이 안 한다. 그냥 밥이나 같이 묵자꼬"


엄마는 그런 분이었다. 속내를 비추지 않으면서도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온기가 서려있는...그래,  어쩌면 그렇게도 당신 고향집 구들장 아랫목을 그대로 닮아 있었는지.



마이 안 한다는 말이 진즉에 거짓인 줄 짐작은 했지만, 그해 생일상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전무후무한 생일상이었다. 오곡밥에, 진하게 끓여낸 소고기 미역국, 잡채는 물론이고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불고기까지 있었다. 화룡점정은 바로 노란 콩고물을 덮어쓴 쑥떡이었다.

이모가 매여골에서 캐온 쑥으로 만들었다는 쑥떡, 우리 가족 3월의 시그니처였던 바로 그 쑥떡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밥을 먹기도 전에 먼저 그 실하고 통통한 쑥떡 하나를 집어 들어 베어 무니, 가슴께가 뜨끈해져 괜스레 지청구를 날려본다.


"엄마, 만다꼬(뭐하러) 집 나간 딸내미 생일상 차렸노!"


" 만다꼬는 먼 만다꼬, 봄이니 쑥떡 무야지, 그라고 인자 오빠야 결혼하믄 이 쑥떡도 몬해준다. 그라이 지금 마이 무라

우리 혜워이는 떡순이 아이가, 떡을 하도 좋아해가"


눈물을 글썽이는 내 모습을 보고는 엄마는 상황을 모면하느라 평소엔 잘하지도 않던 농담까지 해가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애쓰셨다. 내 일생 가장 풍성하고 따뜻했던 생일은 바로 그때가 아니었을까. 수리 중인 1층을 피해 오빠가 지내던 옥탑방에 마주앉아, 마치 이산가족이 모인 듯  헤어져있던 며칠간의 안부를 챙기며 웃고 떠들던 3월 봄밤엔, 익숙한 풀내음이 시나브로 스며들고 있었다.

낯설고도 고마운 행복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생일을 챙기지 않게 됐다. 나이가 들어가는 게 싫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나를 세상에 내놓은 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걸 해마다 떠들썩하게 축하하는 것이 왠지 무의미하게 느껴져서이다.

그런데 또 한 번의 쑥떡(정확히는 빵이다)으로 나의 생일은 재차 기억에 아로새겨지게 된다. 아이가 막 대학 2학년이 됐던 해였다.


아이는 용돈을 모아 뮤지컬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공연을 선물로 마련했었는데, 공연을 보고 내려오는 서울역에서  쑥이 함유된 베이커리의  빵과 윤동주 시집

초판본을 슬쩍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언젠가 지나가는 얘기로 외할머니의 생일 쑥떡을 얘기했었는데, 그걸 기억했던가 보다. 놀라우면서 한편 먹먹했다. 엄마로부터 딸에게로 이어지는 삶의 연속성은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아도 우리 몸이나 정신 어느 한 부분에 명하게 각인된다는 사실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기차 안에서 윤동주의 싯구에 더해, 심심하면서도 단맛을 지닌 빵을 음미하 오래전 그 해 3월, 생일의 오후를 너무도 생생하게 추억했다. 그리고 찬란한 봄볕이, 옥상 위 엄마가 심어놓은 식물들의 잎에 내려앉아 시리게 반짝였던 하루의 풍경을  아껴 곱씹어 보았다. 어느덧 가난에서 벗어난 네 식구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그 시간 속으로 던진 기억의 부메랑 끝에 잊은 줄 알았던 아찔한 쑥향이 성큼 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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