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예고 없이 다가오는 크나큰 파도
영화를 보기 전에 몇 가지 이유로 단단한 마음의 채비를 해야 했다. 우선 실제경험담에 기반한 영화라는 점과, 그 실제 경험담을 나 또한 비슷한 형태로 겪은 적이 있어서이다. 이런 경험의 공유는 자칫 이성을 배제시키고 감정만을 남겨 영화에의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약속을 했다. 그 어떤 장면을 보더라도 눈물을 흘리지 말 것이며, 감정의 그래프를 널뛰도록 놔두지 않기로. 하지만 이 약속은 영화의 전반부에서 여지없이 벌써 무너지고 말았다. 그만큼 장면 장면의 사실감이 바늘이 돼 나를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출산을 경험한 여성들은 다 안다. 그 경험이야말로 미숙했던 한 인간을 성숙의 길로 인도하고, 삶에의 의지를 새롭게 다지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여태껏 몰랐던 새롭고도 신비한 세계로 발을 들인다는 얘기며, 늘 잠재돼 있었지만 쓰지 않았던 힘과 능력을 펼쳐 보여야 함을 각성하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 출산이 기쁨이 아니라, 잿빛으로 물들여진 고통으로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다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은, 꿈에서도 겪기 싫은 그 순간을 맞는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 돼 있을 것인가? 잔인하게도 불행은 그 어떤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거대한 파도로 들이닥쳐오니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 이리라.
■아이가 오고 싶을 때, 올 수 있게/그녀의 말
주인공, 그녀 마사는 자신이 품은 아이에게 보다 자유로운 선택지를 주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보다 편안한 환경에서 익숙하고 평화로운 출산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흔치 않은 '가정분만'을 통해 그녀는 순조로운 출산을 하고자 한다. 예약된 조산사가 다른 분만을 돕고 있어 차선으로 택하게 된 조산사, 그리고 남편과 더불어 차근차근 새로운 생명을 맞을 준비를 하는데, 영화는 이 장면에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이렇게 장시간을 할애한 지에 대해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출산을 겪은 여성으로서 출산의 고통을 너무도 리얼하게 연기해 낸 바네사 커비의 표정에 순응하며 영화를 따라가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이미 출산을 한 여성들은 물론이고 앞으로 출산을 겪을 여성들에게는 보다 큰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을듯해서 더 그랬다. 일생을 통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임과 동시에 가장 숭고한 행위인 출산이지만, 가정분만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이어 오는 불행의 시작은 내내 안쓰러움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왜 가정분만을 고집했을까. 조금 더 안전하고 응급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병원을 선택하지 않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러한 의문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 진통 끝에 마침내 아기가 태어나지만 그러나 이내 숨을 쉬지 않는 아기, 911 사이렌 소리와 함께 영화는 제목을 띄우며 시작한다. 흔치 않은 구성이기에 이후에 펼쳐질 내용 전개에 대한 관심도 사이렌 소리와 함께 자연스레 극대화된다.
■삶의 균열, 파편, 봉합되지 않는 상처
아이를 잃고 난 후, 언 강에 크랙이 생기듯 그녀의 삶에는 크고 작은 균열이 생기게 된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서 백 마디 말보다 더한 아픔을 느꼈다면 너무 과도한 해석일까?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은 이 모든 결과는 조산사의 잘못이라며 소송을 부추기고, 그녀의 삶은 밝혀낼 수 없는 진실과 함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실감의 부피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팽창되는 긴장감으로 어딘가를 향해 치닫는다.
누군가 작정하고 툭 , 치기라도 하면 곧 바스러질 것만 같은, 천 갈래 만 갈래로 금이 간 삶의 조각들. 그녀의 산산이 흩어진 조각들은 다시 제 자리를 찾아 온전한 삶이라는 형태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엄마도, 남편도, 직장동료도 심지어 별 관계없는 사람들조차 그녀의 슬픔과 상실을 이해한다며 공감을 표하지만 그들은 그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아무리 애써봤자 자기 몸으로 낳은 아이가 태어난 지 단 몇 초 만에 숨을 거둔 걸 본, 그녀가 될 수 없기에. 사람들과 대화를하는 동안,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걷어낸 얼굴로 슬픔만을 정확하게 적시한, 바네사 커비의 연기가 단연 돋보였다.
이곳저곳에서 온통 눈에 띄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세상 행복한 모습으로 웃고 떠들면서 마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준비했던 아이의 물건들을 치우며 아이의 흔적을 지우려 애쓰는 마사를 두고 남편은 냉담하다 몰아붙이더니, 담당 변호사와 바람까지 피우면서 가장 큰 부서진 조각이 돼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
그녀의 삶은 이제 시든 식물들처럼, 구멍 난 짐볼처럼, 개수대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그릇들처럼 구차하게 의미를 잃어가고 있음을 화면을 통해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중반부의 이런 은유는 그녀의 삶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에서 어떻게 극적으로 회복의 단계로 돌아설 수 있었는가에 대한 타당성을 제공해준다. 상처 치유를 위한 열쇠는 결국 일상성을 회복해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흩어진 조각들을 끼어 맞춰 새로운 삶을 그려낼까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일상성을 회복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숨지 말고 직면하라는 엄마의 말이야말로 그저 허울 좋은 껍데기가 아니었을까? 화면에서 보인 그녀 마사는 누구보다 상황을 직면하고, 고통을 옷으로 입은 채, 벗을 수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말이다. 결국 부서진 조각을 끼워 맞추고 삶을 재건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음을 그녀도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
10월에 시작된 이야기는 겨울을 지나 어느덧 3월이 되고 조산사의 재판 당일 마사는 주요 증인으로 참석한다. 증인신문과정에서 상대 변호사의 공격적인 질문들에 답하면서 그녀는 문득, 아기에게 사과향이 났다는 걸 떠올렸다. 비록 아주 잠깐의 찰나였지만, 출산 당시의 그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아이는 향기로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걸 늦게나마 각성하게 된 것이다. 출산 당일 아기가 찍힌 필름을 인화하며 기억에서 밀어내고 있었던 당시의 기쁨과 환희, 그리고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걸 감지한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실에서 그녀는 자기 인생에 가장 밝은 빛이 비치던 그 순간을 마음에 깊이 저장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법정에서 조산사의 잘못이 아니라는 증언을 한다. 이윽고 아기가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담담히 얘기하며 싸움을 그만두게 된다. 냉장고에 보관해 놓은 사과 씨앗들이 발아한 것을 보며 자신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니라 멈춰있었고, 머지않아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표정 하나로 이야기하면서.
아이의 유골을 강에 뿌려주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무거운 과거와도 이별을 고하는 마사. 엄마의 치매를 말해주는 장면에서는 엄마의 손을 맞잡으며 왜 그렇게 말도 안 되고 잔인한 얘기들을 엄마라는 사람이 했는가에 대한 이해도 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마지막 장면, 늦여름 주렁주렁 탐스런 사과가 가득 열린 나무에서 사과를 베어 무는 한 여자아이, 그녀가 품고 있던 삶의 씨앗은 그렇게 나무가 되고, 새로운 밑거름이 돼 풍성한 결실을 맺고야 말았으니.
■산산이 조각난 인생도 언젠가는 완성된 퍼즐이 될 거예요
영화 러닝타임의 시간적 배경은 이렇듯 가을에서 시작해 늦여름까지다. 사계절의 사이클이 고스란히 담겼다. 자연의 거대한 순환을 통해 우리의 삶도 그렇게 순환하고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한 건 아닐까 싶었다. 더불어 자연이 가지고 있는 자기 치유, 자기 회복력을 통해 마사가 조각났던 삶을 스스로 수습하고 상처를 보듬으며,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됐다는 걸 보여주려 한 건지도.
각각의 서로 다른 조각이 이어져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퀼트처럼 삶에는 고통과 상실, 이별 같은 어두운 색의 조각도 있지만, 용서와 배려, 희망이라는 환한 빛을 띤 조각들도 있기에, 우리는 또 오늘을 딛고 내일을 살아내리라 다짐하곤 하는 건 아닐까. 마사가 그 누구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 찾아낸 아름다운 삶의 조각, 잃어버린 줄 알았던 혹은 잊고 있었던 그 마지막 퍼즐, 초여름의 햇볕처럼 따뜻하고도 건강한 삶의 조각.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고매한 사랑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