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편집자의 협업 요령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겪는 소통상의 어려움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일본에서 겪은 일이다. 일본의 인문서적 출판사인 세이도샤(靑土社)는 디자인을 맡길 때 디자인 의뢰서와 완성된 원고를 인쇄한 두툼한 종이뭉치를 서류봉투에 담아 택배로 보내온다. 원고가 완성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으며, 당연히 책의 제목도 확정된 상태로 온다. 자신의 일을 완성한 다음 다음 사람에게 일을 넘긴다. 그렇게 받았으니 확신에 찬 단 하나의 디자인을 보내야 한다. 세이도샤는 몇명의 디자이너와 오래 일한다. 아마도 그곳의 편집자들은 원고와 디자이너의 매칭까지를 중요한 자기 역할로 생각했을 듯 싶다. 나머지는 디자이너에게 맡기고 최대한 말을 아꼈다. 물론 일본의 모든 출판사와 디자이너가 이렇게 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도로 숙련된 몇몇 사람의 방식일 뿐이다. 또한 한국 사람의 정서와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매우 순조롭게 합을 맞추는 방식 중에 이렇게 건조한 것도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맡기기 보다 이끌기를 원한다. 그러다보니 말이 많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상대에게 정확히 전하는 것은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 확인조차 어려울만큼 어려운 일이며,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미지로 전환하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기에, 예상대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한 뇌과학자는 개념을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일(생각을 손으로 그리는 일)을 익히는데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누군가를 이끌려면 일단 본인이 얼마나 성공하기 어려운 일을 시도하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이 자각이 부족하면 남을 탓하기 마련이다.
오래 일할 사이라면 꾸준히 대화하며 공통의 어휘 만드는 것이 참 중요하다. 관계는 공통의 어휘가 생겨야 안정기로 넘어간다. '말랑말랑하게'의 뜻이 제대로 통하려면 수많은 의미 다발 중 아닌 것을 하나씩 걸러내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다 서로의 철학과 목적까지 이해하면 숙성기에 들어선다. 물론 처음 만난 사람과도 잘 통할 수 있지만 드문 일이다. 드문 일을 당연히 생각하면 세상이 지옥으로 보인다. 일은 어렵다. 어려운 일을 해냈기에 돈도 벌고 성취감을 느끼며 재미도 붙인다. 어쩌면 그 어려운 일을 함께하기 위한 대화가 일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물론 '사이좋게'가 대화의 본질은 아니다. 질문과 대답으로 같음과 다름을 찾다보면 때론 불편하고 때론 헤어지기도 하지만 그 또한 해피엔딩이다.
오래 일할 지도 모르겠고 당장 급하다면 ①스스로 하거나 ②맡기면 된다. 섣불리 빠르고 정확한 소통을 추구할수록 비싸고 안좋은 콘텐츠가 나온다. 결코 해서는 안될 일만 확실히 전달하고 맡겨보자.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렇게 하라고 권하는 책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