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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몬라떼 Mar 05. 2024

그놈의 R&R에 대한 고찰

침범해서도, 못지켜서도 안되는,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나의 영역

신입사원 시절에 같은 팀 대리님께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디지털마케팅 파트에서 파트장님과 둘이 일하고 있었고, 대리님은 다른 파트 분이셨다. 우리 두 파트가 함께 대고객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벤트 준비가 처음이었던 나는 이 일이 얼마나 바쁜지, 세부적으로 어떤 일들을 해야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조금 원망하긴 했지만 당시 파트장님도 이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시지 않았고, 나는 어느날 내가 해야 할 일들과 야근하는 대리님을 뒤로한 채 아무것도 모르고 일찍 퇴근해 버렸다. (진심으로 무엇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게 화근이었다...)



다음날 대리님은 화가난 채 나를 회의실로 부르셨고, 내가 했어야 할 일들을 대신 한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R&R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회사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역할이 있고, 내 역할을 알맞게 잘 지키는 것이 일을 잘하는 법이라 하셨다. 내 일을 덜 해서도 안되고, 다른 사람의 영역에 함부로 침범해서도 안되고, 특히나 이 날처럼 내가 해야할 일을 다른 사람이 하게 됐다면 기분나빠 해야 하는 것이라 하셨다. 이날 이후로 나는 어떤 일을 하든 그 영역을 지키고자 했다. 내가 할 업무의 영역에서는 최대한의 성과를 이끌되, 다른 사람의 업무에 함부로 끼지 않을 것, 혹여나 다른 사람이 나의 업무를 넘볼 때는 그것을 잘 지킬 것. 누군가 내가 맡은 업무를 보면 나라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할 것.



R&R: Roles and Responsibilities

나의 역할과 그에 따르는 책임들



그렇게 약 3년을 일하고 현재 회사로 이직을 했고, 매우 빠른 속도로 적응했지만 딱 하나 적응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R&R의 부재!


내가 그렇게 교육받고 단단히 지켜온 R&R이라는 것이 이곳에는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 금융 회사에서 일하다 자유롭고 수평적인 IT회사로 넘어와서 그런가, 무언가 명확하게 딱딱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할 일도 내가 스스로 찾아서 만들어야 했고, 필요하면 다른 사람의 업무 영역이라 생각 되는 것을 침범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일을 일로 바라보고, 누구든 그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방식인 것이다.



첫 6개월 정도는 이것 때문에 꽤 힘들었다. 특히나 일을 앞장서서 하는 편인 나는, 옆사람이 해야 할 일을 덜하는 것을 보면 내가 다 해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미 울타리를 넘지 않는게 습관이 되어버린 나는 그의 일을 직접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고, 어떻게 하면 그 분이 이 일을 하게 할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뭐라 말하기도 애매했던게, 우리는 수평조직이라 직급은 없지만 그분이 나보다 연차도 나이도 훨씬 많은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어린 사람이 이것 좀 하시라고 하면 웃기니까...



사실 나를 스트레스 받게 하는 건, 일이 아니라 바로 이런 지점이었다. 팀장님과의 면담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는 나에게 아직 우리 팀이 작아서 본인도 신경을 덜 쓴 지점이라며 앞으로 좀 더 명확한 팀 업무를 만들어보겠다고 해주셨다. 그리곤 나에게 "옆사람한테 그냥 말로 하세요"라며, 우리는 윗사람 아랫사람이 없으니 그저 옳은 말을 한다면 그게 누구든 상관 없다고 하셨다.



그 이후로 우리팀에 가장 최근에 들어오신 분이 나와 같이 금융회사에서 이직을 해오셨는데, 어느날 이분이 나에게 자신의 업무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헷갈려 적응이 힘들다고 하신 적이 있다. 정확히 내가 1년 전에 겪었던 고민이라, "원래 여기가 이런 것 같아요. 누군가가 명확하게 나눠주지는 않지만 내가 내 영역을 만들어야 하고, 그만큼 자유롭게 개척하려면 할 수 있지만 또 도태되려면 도태될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라고 말씀드렸다. 내가 스스로 울타리를 세우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여기까지가 네 땅이라고 알려주지 않는 곳. 여기는 그런 회사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은 팀이 좀 커졌고, 그러면서 업무도 명확해진 편이다. 나는 내 영역을 형성했다. 여전히 영역 침범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나라 - 회사 인사팀에서 진행한 '태니지먼트' 테스트에서 나는 역할 분배를 잘하는 '조정가' 형이 나왔다. 어쩌면 사수님과 전회사의 영향이 없었어도 태생이 역할 나누기를 좋아했을지도 - 애매하게라도 내 업무 영역에 누군가 들어오면 묘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R&R 울타리의 높이를 조금 낮출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다른 회사로, 혹은 다른 팀으로 이동하게 되면 또 다른 형태의 R&R을 만나게 되겠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나의 역할과 그에 따르는 책임들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 본인의 R&R에 대한 고민을 하고있다면, 타인의 영역과 비교하거나 누군가가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오는지를 경계하는 것보다는 주어진 업무 환경 속에서 자신이 정말 맡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확고한 영역을 형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면 좋겠다. 누군가가 자신을 떠올렸을 때 '아 이 업무는 그 사람이 담당이지' 혹은 '그 사람이 이건 잘하지'를 바로 내뱉을 수 있도록. 회사에서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적 자원'이 아니라 '인재'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놈의 R&R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 첫 걸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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