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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감미 Aug 25. 2021

일상적인 죽음은 없다

뉴스아님 여덟번째


뉴스(news) = 새로운 소식을 알려 주는 방송 프로그램이나 그러한 보도



뉴스아님은 천안의 한 카페에서 만들어졌다. 「저널리즘의 미래(이정환 외 2명)」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 나왔다.



- 김세은 교수는 "(중략) 기자 스스로 '나는 누구를 위해서 이 기사를 쓰고 있나'라는 물음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알랭 드 보통은 "언론이 칭찬받아야 하는 부분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지적 편향을 통해 사실의 타당성을 가려내는 기술이다"라고 지적했다. 뉴스 구독 행태가 진화하며 등장한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이 역설적으로 빗어낸 '뉴스 없음'의 시대에서 저널리스트가 꼭 기억해야 할 대목이다. 2015년 BBC가 내놓은 「뉴스의 미래」 보고서의 주요 의제는 '뉴스 대 소음 News vs Noise'이다.



이 글에서 나오는 '뉴스 없음'을 보고 뉴스아님을 떠올렸다. 글 계정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스윽 들어온 단어로 계정 이름을 정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서 '뉴스같지만 뉴스가 아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뉴스아님 뜻을 물어봤을 때 이렇게 대답하면 정말 없어보일 거 같아서 설명할 만한 뜻을 곰곰히 고민했다. 얼마 안올렸을 때, 몇 개의 글들을 돌아본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뉴스'의 본 뜻인 '새로운 소식'은 아니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 이러한 다짐으로 뉴스아님 이름 뜻을 이야기하면 꽤 그럴듯해 보일 것 같기도 했고, 실제로 그런 얘기를 담아내고 싶었고 담아내야겠다는 의지 또한 점점 커졌다.



이렇게 얼렁뚱땅 지어진 이름이지만 그 뜻에 충실하다고 할만한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필자는 사실 뉴스를 그렇게 많이, 열심히 보진 않는다. 정계 이슈에 밝지도 않고, 시사 토론에 뛰어들 수 있을 만큼의 한 사안에 대한 뚜렷한 주장과 근거도 머릿 속에 없는 편이라 분명 뉴스를 꼼꼼히 보지 않는 사람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카카오톡의 # 메뉴탭의 뉴스란은 한 번씩 본다. 젤 첫페이지에 떠있는 뉴스들을 쭉 보고 눈길이 가는 것만 눌러서 읽는 편이다.



이렇게 훑듯이 뉴스를 보는 필자도 한강 의대생 사건에 대해서는 대충 안다. 의대생이 한강에서 술먹다가 연락이 끊긴 뒤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친구가 범인으로 지목돼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하고 있고, 두 집안이 상당한 재력이 있는 집안이고, 언론과 경찰을 못믿는 사람들이 분노해 진상규명 시위를 열고 등등.. 한 번도 제대로 관련 기사를 정독해보지 않은 필자가 지금껏 올라온 기사들의 제목들만 봤을 뿐인데도 대충 이정도로 알고 있다.



그리고 최근 부끄러워지는 일이 있었다. 뉴스 채널이 아닌 지인의 인스타 스토리를 통해 청주에서 여중생 2명이 한 명의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동반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스토리를 보고 나서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이들은 교내 상담센터에서 지속적으로 상담도 받고 있었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검찰이 영장을 세 번씩이나 반려시켜 가해자 처벌에 대한 진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5월 12일 아파트 화단에서 이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4월 25일에 실종되었던 한강 의대생은 3주가 지난 지금도 어느 뉴스 채널을 가나 탑 기사로 거론되는 한편, 여중생들의 이야기는 탑 기사 목록에서 자취를 감췄다. 여자아이와 성폭행, 그리고 죽음은 나흘이나 지난 지금, 더 이상 '뉴'스가 아니기 때문인 것일까.



그 전에도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많은 죽음들이 '뉴스'라는 이름 위에 올라와 있다. 온 국민을 슬프게 했던 정인이의 죽음과 양부모의 처벌, 미얀마 반군부 시위로 지금도 끊임없이 죽어나가는 미얀마 시민들, 잔혹하게 살해당한 후 유기된 채무자, 간호사에게 성폭행 당한 뒤 죽음을 맞이한 인도의 환자, 앞서 언급한 한강 의대생과 청주 중학생들. 그리고 지금 뉴스는 이스라엘 공습으로 가자 지역에서 몇십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보도가 올라오고 있다. 또, 내일이 '강남역 여성살인' 5주기라는 뉴스가 길 위의 공포심을 습관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죽음이라는 뉴스가 일상화되고 있는 한편, 솔직히 필자와 가깝게 느껴지는 뉴스는 한정적이다. 필자는 폭력이 없고 사는데 무탈한 집안에 살고 있고, 5.18 민주화 운동이 한참 지나 나름 평화롭다고 할만한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시시때때로 공습이 일어나는 위험한 분쟁 지역에 살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수 많은 죽음 앞에 내 일처럼 느끼고, 처절하게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느끼는 일은 단연 '또래 여성의 죽음'이다.



필자의 시선은 객관화되지 못해 스스로도 믿기 어렵겠으나, 한 명의 사람이고, 뉴스를 자주 훑어는 보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보이는 대로 이야기하자면, '여성의 죽음'은 너무나도 일상화되어있다. 뉴스에 매번 나오지만 금세 사라지는 게 여성의 죽음이다. 나라는 인간 한 명의 일상 속에는 죽음이 없지만, '아직까지는' 없다는 전제 하에 살아간다. 필자와 일면식도 없고, 관련없어 보이는 한 여성의 죽음에 대한 뉴스가 전혀 맥락없진 않게 다가오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위협이 이미 일상 속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문단에 앞서 괜한 말까지 붙여가며 밑밥을 깐 이유는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다. 필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성들이 다양한 정도의 죽음의 위협, 비난의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것조차 비난의 대상이 돼버리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비일상적 죽음들 속 일상적 죽음. 수 많은 뉴스 속 사실은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들. 무거운 처벌과 끈질긴 주목만이 이들의 죽음을 '비일상'으로 꺼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청주 중학생들의 자살 원인이 계부의 성폭행과 관련이 있는지 수사를 해야만 안다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 하고, 도대체 언제까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에 대한 댓글에는 추모가 아닌 비난이 가득차는 걸 봐야한단 말인가.



요즘은 언론사가 포털사이트에 굉장히 의존적이라고 한다. 종이신문이 가고, 사람들이 포털 사이트 뉴스 탭을 통해 기사를 더 많이 찾기 때문이다. 뉴스 자체 사이트 조차 포털을 통해서 들어간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어뷰징 기사*가 많이 생산되고, 사람들이 계속해서 소비할만한 자극적인 기사들만 앞다퉈 나오게 된다. 그래야 '클릭'이 생기고, 그 횟수가 곧장 광고가 붙는 수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다시 여기에 희생이 되는 것이다. 일상적인 죽음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테니까. 자본주의, 여성혐오 등 너무나도 많은 벽들이 이들의 죽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비일상적 죽음에 그래왔듯이 이 많은 벽들에 시선을 거두지 않고, 벽이 생긴 원인을 파악해 다시는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진상을 파헤쳐야만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그 죽음은 몇 겁을 거처서라도 이 사회의 누군가의 삶과 맞닿아있다. 이걸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한 사람의 자살, 타살, 조용한 죽음, 주목받는 죽음 등 어떠한 죽음이든 추모로 시작해, 다음의 희생은 없도록 끊임없이 산 자의 의무를, 인류라는 굵고 긴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다음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어뷰징 기사 :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제목이나 내용을 조금씩 바꿔가며 같은 기사를 반복적으로 송고하는 행위를 가리킴.


▲대문 사진 : 강남역 살인사건 5주기를 맞아 서울여성회에서 마련한 온라인 추모공간 캡쳐


#뉴스아님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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