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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Oct 04. 2019

19. 호위사령부와 '인간방패'

내가 군복무를 한 부대는 1992년 당시 생존했던 김일성 경호부대-호위사령부였다. 호위사령부는 당시 4개의 국, 12개 전투여단, 수개의 직속 연대, 직속 대대들, 종합군관학교 등 교육기관들로 구성되고 현역 장병만 10만 명에 달하는 군단 규모의 무력기관이었다.

북한군에서 정치사상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충성심 교육과 반미, 반한, 계급교양이었다. 특히 김일성 경호부대인 호위사령부에서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절대충성은 생명이었다. 호위사령부는 인민무력부 등 다른 북한군 부대와도 교육내용 자체가 달랐다. 호위사령부 정신교육 내용 중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반대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용서치 말고 무자비하게 짓뭉개야 하며 그 대상이 설사 피를 나눈 부모형제라고 해도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한다는 내용까지 있다. 호위사령부 군인들은 10년 이상의 군복무 기간 해마다 전투정치훈련 기간 일평균 2시간 이상씩 진행되는 정치상학 등 교육시간에 이 같은 정치사상교육을 받는다.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만을 요구하는 것이 호위사령부의 불문율이었다. 99%의 충성도 용납되지 않았다. 오직 100%의 순도 높은 충성심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호위사령부 정치부는 교육과정에서 호위사령부의 자랑스러운 전통에 대해서도 교육했다. 6.25전쟁 때 공군력의 열세로 제공권을 빼앗긴 북한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김일성도 6.25 전쟁 중 미 공군의 공습으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래서 김일성이 6.25 전쟁 중 다짐한 것 중 하나가 세계 최강의 공군을 건설해 다시는 북한 영공에 미군기가 날아다니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후 김일성은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군 전투기 구입에만은 돈을 아끼지 않았고 비행사들에 대한 대우도 잘 해주었다. 북한군 초모 때 제일 먼저 뽑아가는 것이 비행사, 다음에 호위사령부일 정도로 공군 조종사는 북한군의 꽃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6.25전쟁 때 김일성의 공습콤플렉스가 한 몫 했던 것이다.


호위사령부 정치부에서 발간한 정치상학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이 6.25전쟁 중 전선시찰을 가다가 미군의 공습을 받았다고 한다. 마땅히 몸을 숨길 데가 없는 허허벌판에서 갑작스런 공습을 당했다. 이때 김일성을 경호하던 호위병들이 김일성을 차에서 끌어내려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자기들이 그 위를 몇 겹으로 덮어 인간방패를 만들었다. 그때 호위병들의 살신성인으로 김일성은 목숨을 건졌지만 호위병 여러 명이 전사했다. 김일성은 훗날 여러 차례 이들의 희생정신을 언급하고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김일성을 경호했던 호위병들은 '친위중대'였다. 친위중대는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투쟁을 함께 했다는 항일유자녀들로 구성된 중대였다.

                                                                               출처:  중앙일보 참조


 이때부터 '인간방패'는 호위사령부의 자랑스러운 전통이 됐고 이들은 호위사령부가 배출한 전쟁 영웅이 됐다. 바로 이들처럼 수령을 위해서라면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쳐 싸워야 한다는 것이 호위사령부 정신교육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호위사령부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내 걸었던 구호가 “결사옹위”, “육탄정신”, “성새정신”, “방패정신”, “자폭정신”이었다.

                                                                       

                                                                   출처: NK뉴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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