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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Nov 04. 2019

30. 북한이 생각하는 6.25전쟁의 실패 이유

그곳에서 6.25는 '북침'이었다

북한은 휴전 협정이 체결된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로 지정하고 국가적인 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6.25전쟁을 “전승”이라고는 주장하지만 적화통일을 완수하지 못한데 대해 북한도 면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북한이 6.25전사에서 가르치는 실패 요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을 예상하지 못한 점, 소련의 군수지원이 제때에 대규모로 이뤄지지 않은 점, 서울을 점령하고 며칠 동안 승리를 자축하며 시간을 허비해 한국군이 방어선을 구축케 하고 미군 개입의 시간을 준 점, 전쟁 초기 전진에만 신경 쓰면서 추격전에 몰두해 철저한 포위섬멸을 하지 못해 미군과 한국군 유생역량을 보존케 한 점 등이 있다.




북한은 미국이 그렇게 신속하게 한반도에 유엔군과 일본 주둔 미군을 투입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기는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전쟁을 속전속결하는 것이 북한의 목표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미군이 6.25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쟁의 판도는 달라졌고 결국 김일성은 남침 야욕을 실현하지 못했다. 6.25전쟁에서 얻은 이런 교훈 때문에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에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이다. 미국과 한 번 붙어 본 김일성은 미군이 한반도에 있고 한미동맹이 있는 한 적화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출처: 1950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7개 이사국이 손을 들어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의하고 있다. [중앙포토]


또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도 미스터리였다. 전문가들은 중국을 약화시키려는 스탈린의 음모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 소련의 군수지원이 제때에 이뤄지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북한도 전후 소련이 많은 군수지원을 해주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면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지연시켰다며 격분해 했다. 그래서 김일성이 전후 자립경제, 자위의 국방노선을 세우고 자력으로 무기 국산화를 고집했다는 것이다. 물론 과장된 측면은 있다. 전후 소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른바 “주체”를 확립하는 과정의 일환인 점이 더 컸을 것이다.




서울을 점령하고 시간을 끌어 미국과 국군에 시간을 준 점은 북한군에서 아직까지 교훈으로 삼는 부분이다. 당시 민족보위상이던 최용건이 김일성의 말을 듣지 않고 수도를 함락시키면 며칠 동안은 자축연을 베풀던 관례에 따라 흥청대며 축하파티를 즐겼다는 말도 있고 전열을 재정비하며 후방에서 박헌영이 장담했던 남로당원들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얘기도 있다.




전쟁 초기 전진에만 신경 쓰면서 추격전에 몰두해 철저한 포위섬멸을 하지 못해 미군과 한국군 유생역량을 보존케 한 점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전쟁기간은 물론 전후에도 여러 차례 비판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전법 교육에서 포위작전에도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대전포위작전에 대한 연구와 이를 현대전에서 써먹기 위한 다양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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