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인물들 31
감녕은 자가 흥패(興覇)이며 익주 파군 임강현 사람입니다. 다만 배송지의 주석에 인용된 오서(吳書)라는 책에 따르면 원래는 형주 남양군 사람이었다가 선조 대에 익주로 들어갔다고 전하네요. 한때나마 관직을 얻었지만 얼마 안 되어 때려치웠다는 설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있었고 유협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말이 좋아 협(俠)이지 실상은 패거리를 지어 다니며 깡패 짓을 하고 다녔다는 뜻입니다.
감녕은 무뢰배들을 모아 활과 쇠뇌로 무장시켰습니다. 무리들이 허리에 방울을 찼기에 사람들이 멀리서도 방울 소리를 듣고 감녕이 나타난 줄 알았다고 합니다. 멋대로 사람을 죽였고 또 죄지은 자들을 감춰 주기도 했습니다. 여러 관원들을 만나면서 융숭하게 접대해 주면 좋아했지만 마음에 차는 대우를 받지 못하면 부하들을 풀어 재산을 강탈했습니다. 하는 짓으로 보면 빼도 박도 못할 범죄자인데, 아마도 그 세력이 워낙 대단하였기에 관원들도 제대로 토벌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단순한 도적떼를 넘어서 소규모 군벌 수준이었던 걸로 짐작될 정도지요. 더군다나 그렇게 빼앗은 재물의 양이 얼마나 어마어마했던지, 배를 정박시킬 때 평범한 밧줄 대신 비단으로 배를 메어 두고 출항할 때는 그 비단을 뎅겅 잘라버림으로써 사치스러움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감녕의 이러한 무도한 짓거리는 거의 20년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 감녕은 갑작스레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의탁합니다. 감녕전에는 그저 제자백가의 책을 읽고(공부를 하고) 유표에게 갔다고 적혀 있을 뿐입니다. 이 기록만으로 보면 젊었을 때 제멋대로 살던 자가 나이든 후에 뉘우치고 마음을 바로잡은 걸로 보이지요. 그러나 유언전 주석 영웅기를 보면 상황이 좀 다릅니다. 유장의 부하인 심미, 누발, 감녕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다 형주의 별가 유합이 합세했지만 유장에게 패했다는 구절이 있거든요.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유언이 죽고 유장에게 익주의 권력이 넘어가는 시점에서(194년) 감녕 등이 유표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도망쳤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지만 저는 이게 맞는 것 같아요.
여하튼 그런 연유로 감녕은 형주로 왔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빈객 등을 합쳐 무려 800명이나 되는 무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용되지 못했습니다. 유표 입장에서도 이 위험한 사내를 굳이 중하게 쓸 이유를 느끼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유표는 손견을 물리치고 원술을 세력권 밖으로 내쫓는 등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또 비록 망명해 왔다지만 여전히 수백에 달하는 사사로운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던 그를 경계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연유로 하릴없이 기나긴 세월만 보내던 감녕은 다시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 황조에게 의탁합니다. 그러나 황조마저도 그를 우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203년에 손권이 공격해 와서 황조가 곤궁에 빠졌을 때, 직접 활을 쏴서 손권의 부하 능조를 죽임으로써 황조를 구출해 준 적이 있었음에도 그랬습니다. 오직 황조의 부하인 소비라는 자만이 감녕의 능력을 알아보고 몇 차례나 그를 천거했습니다. 하지만 황조는 오히려 감녕의 빈객들을 흩어지게 하는 등 감녕을 더욱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에 소비는 다시 황조에게 말하여 감녕을 변방의 현장으로 삼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감녕에게 귀띔해 주었지요. 내가 몇 차례나 그대를 천거했지만 나의 주인은 그대를 무겁게 쓸 생각이 없다. 그러니 원한다면 외곽에 있다가 틈을 보아 다른 주인을 찾으라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감녕은 또다시 동쪽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손권에게로.
동오에서 감녕의 처지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당시 손권은 내부에서 빈발하는 반란과 외부에서 동오를 노리는 적들 때문에 인재가 절실한 상황이었거든요. 주유와 여몽이 연달아 감녕을 천거했고, 손권은 감녕을 그들처럼 특별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이에 힘을 얻은 감녕은 황조를 공격하여 강하를 차지한 후에 점차 형주를 거쳐 익주까지 차지하자는 의견을 냅니다. 자못 크고 웅대한 그림이었지요.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당시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말만 앞세우는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장소가 극력 반대했지만, 손권은 감녕의 손을 들어준 후 황조를 공격할 군사를 일으킵니다.
208년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동오는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황조를 사로잡습니다. 이 승리는 동오의 입장에서 요충지인 강하를 드디어 확보했다는 의의가 있었고, 손권 개인으로서도 아버지 손견의 원한을 갚았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때 손권은 기뻐하며 황조와 소비의 목을 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소비에게서 은혜를 입었던 감녕이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손권에게 사면을 부탁했습니다. 심지어 소비가 도망치면 자기 목숨을 대신 내놓겠다고 장담하기까지 했지요. 덕분에 소비는 살아날 수 있었지만 황조의 머리통은 장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감녕은 손권 휘하의 맹장으로서 여러 전쟁에 종군합니다. 적벽대전 때는 주유를 따라 활약했고, 이후 이어진 남군 공방전에서는 군사 일천 명으로 이릉성을 함락시킨 후 그 다섯 배나 되는 병력에게 포위당하고도 성을 지키는 공로를 세웠습니다. 이후 익양대치 때는 소수 병력을 이끌고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막아냈고, 뒤이어 환성을 공격할 때는 승성독(升城督)으로 임명되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수훈을 보이며 마침내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써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되어 장군의 반열에 올랐지요.
그리고 유수구 전투에서는 자못 역사에 기록될 만한 용맹함을 드러냈습니다. 한밤중에 건장한 병사 백 명을 거느리고 조조의 진영에 침투하여 제멋대로 잔뜩 휘저은 후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거든요. 이때 손권은 비단 1천 필과 잘 드는 칼 1백 자루를 하사하면서 ‘맹덕에게는 장료가 있지만 내게는 흥패가 있으니 족히 대적할 만하구나!’라고 감탄했습니다. 비록 아주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대단한 전공이었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능조의 아들인 능통과의 관계는 극도로 나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능통은 아버지의 원수인 감녕을 죽여 복수하기를 원했지요. 그래서 연회자리에서 능통이 칼춤을 추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감녕 역시도 극(戟)을 들고 춤을 추고, 이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여몽이 벌떡 일어나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일도 있었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후 감녕이 능통의 목숨을 구해줌으로써 서로 화해하는 일화가 등장하지만 다만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 실제로 두 사람간의 원한은 끝내 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감녕이 죽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러 가지 정황증거로 미루어볼 때 215년에서 221년 사이가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 손권은 매우 비통해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치고는 아들 감괴가 죄를 짓자 용서 없이 회계로 내쫓아버리기도 했습니다만, 손권은 무려 주유의 아들조차 내쳤던 사람이니 이해는 갑니다.
감녕의 담대하고 과감한 성격은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도 무척이나 인상적입니다. 이릉성을 지킬 때는 적들이 성 안으로 화살을 마치 비처럼 퍼부었지만 병사들이 두려워하는 가운데 오직 감녕만이 태연자약했다고 합니다. 합비에서 싸울 때는 장료의 급습을 받아 손권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군악대에게 어째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호통을 쳤지요. 상술하였다시피 유수구 전투에서 고작 일백 명을 거느리고 수십만 대군의 본영을 기습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감녕은 매우 거칠고 난폭한 사내였습니다. 애당초 무뢰배들을 끌어 모은 집단의 두목에 가까웠고, 이십 년 동안이나 온갖 범죄 행각을 벌이고 다녔으며, 마침내 반란까지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도망친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격이 잔인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부엌에서 일하는 꼬마 하나가 잘못을 저지른 후 여몽의 군영으로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여몽은 감녕이 분명히 꼬마를 죽일 거라 확신하고는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녕은 자신을 천거한 사람이자 상관인 여몽에게 예물을 갖추어 방문하고 그 어머니까지 배알함으로써 진정한 친구로 사귀겠다는 뜻을 보이고 또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꼬마를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배로 돌아오자마자 꼬마를 직접 쏴 죽이는 엄청난 성깔을 보였습니다. (참고자료 : https://brunch.co.kr/@gorgom/10 )
그랬기에 간혹 감녕이 우수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등용되지 못했다가 겨우 손권을 만나 마침내 날개를 폈다는 식의 해석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위험하고 난폭한 자를 등용하지 않는 게 오히려 정상 아닐까요? 유장, 유표, 황조 세 사람이 연달아서 감녕을 쓰지 않은 건 그들이 하나같이 무능한 멍청이들이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감녕이 그만큼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까닭이겠지요. 유장 휘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자가 내 밑에서는 고분고분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분명 날카로운 칼이지만, 너무나 날이 선 나머지 주인을 해칠지도 모르는 그런 칼이 바로 감녕이었습니다.
반면 손권이 그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손권의 입장에서 감녕의 단점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장점을 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손권은 감녕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가장 아끼던 장수인 능통의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감녕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한 활약을 보임으로써 보답했습니다. 간혹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아주 큰 사고를 친 적은 없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손권의 사람 보는 안목은 물론이고 용인술도 꽤 훌륭한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유장, 유표, 황조 세 사람과는 달리 손권은 감녕을 쓸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