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인물들 34
이막은 자(字)를 한남(漢南)이라고 하며 익주 광한군 처현 출신입니다. 사실 이 사람은 자신의 별전이 따로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촉서 양희전에 딸려 있는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이라는 글에 덧붙인 배송지 주석에나 등장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막에 대해 설명하는 건 그가 워낙 특이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씨 형제는 모두 넷(혹은 그 이상)이 있었는데, 저마다 재주와 명망이 있어서 주위 사람들이 이씨삼룡(李氏三龍)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상당히 낯부끄러운 명칭이지만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뜻이죠.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형제가 넷인데 삼룡(三龍)이라니요.
사실 이막은 삼룡에 들어가지 않아요. 이씨삼룡은 이조와 이소, 그리고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요절한 형제까지 해서 이렇게 셋을 지칭합니다. 기록은 이렇게 전하네요.
이막의 제멋대로임이 지나쳐서 삼룡에 포함되지 못했다.(邈之狂直,不得在此數)
-촉서 계한보신찬 주석 화양국지
상당히 의역했는데,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자기만 옳다고 믿는 외골수였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미칠 광(狂)자를 쓸 정도였으니 얼마나 성격이 엉망진창이었는지 알 만하지 않습니까.
실제로도 이막은 항상 사고를 치고 다녔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상황과 장소를 분간하는 눈치가 아예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저지른 실수는 모두 이른바 설화(舌禍), 혀가 불러온 재앙이었습니다.
이막이 저지른 첫 번째 사건은 유비가 상대였습니다. 이막은 본래 유장의 휘하에 있었지만 유비가 익주를 차지한 후 그의 종사(從事)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설날 연회 때 유비가 기분 좋게 술잔을 돌리자, 그 잔을 사양하고는 갑작스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진위장군(유장)은 장군(유비)과 더불어 황실의 친족으로, 함께 역적을 토벌하려 했지만 미처 공적을 세우기 전에 먼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장군께서 우리 주(익주)를 취하신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친족인 유장을 쫓아내고 이 땅을 차지한 건 잘못된 일이라는 거죠.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은 유비는 화가 치밀었을 테고, 주위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을 겁니다. 아마도 분위기가 몹시 차가워졌겠지요. 유비가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물었습니다.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그(유장)를 돕지 않소?”
이막이 대꾸했습니다.
“무서워서 못하는 게 아니라, 다만 힘이 부족할 뿐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내 목을 날려달라는 요청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당시 익주의 독보적 권력자인 유비에게 드러내 놓고 반발하는 건 독창적인 자살방법이라 해도 크게 잘못된 표현이 아닙니다. 법을 맡은 관리도 이막을 죽여야 한다고 주청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제갈량이 그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여 이막은 살아납니다. 생각하면 장완이 일을 내팽겨 치고 술에 떡이 되어 있다가 다름 아닌 유비 본인에게 걸려서 크게 경을 치르게 되었을 때에도 그를 용서해 달라고 청한 제갈량입니다. 아마도 이막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혹은 주군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목을 날려 버린다면 유비의 인덕에 흠이 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후 이막이 승승장구하면서 승진하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전자거나 혹은 둘 다가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어쨌거나 제갈량 덕분에 저승의 문턱에서 돌아온 이막은 건위태수(犍爲太守), 승상참군(丞相參軍), 안한장군(安漢將軍)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그러나 228년, 그는 두 번째 위기를 맞이합니다. 물론 스스로의 혀가 불러온 재앙이었습니다. 이번 상대는 뜻밖에도 지난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제갈량이었지요.
당시 제갈량은 북벌에 나섰지만 마속의 크나큰 실책 때문에 패하고 돌아온 상황이었습니다. 제갈량은 원칙을 내세워서 마치 친동생처럼 여겼던 마속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반대하고 나선 자가 이막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진(秦)은 백리시를 용서하여 서융(西戎)의 패업을 이루었습니다. 반면 초(楚)는 성득신을 주살한 이후로 천하를 다투지 못했습니다.”
백리시는 진나라의 명신 백리해의 아들로, 진(晉)과의 전쟁에서 패했으나 진목공은 그를 계속 임용했습니다. 그 결과 백리시는 다시 한 번 전쟁을 치러 진(晉)을 격파하고 치욕을 씻었지요. 한편 성득신은 진(晉)과 싸우다 패하였는데 초성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처형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나라는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막이 두 사람의 일화를 꺼내든 건 능력 있는 부하를 처형하지 말고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막에 대한 신뢰마저 거두고는 그를 성도로 돌아가게 할 정도였습니다. 대체로 일평생 부하들의 언로(言路)를 막지 않으려 노력했던 제갈량이었지만, 그때만은 마속의 도주를 방치했던 상랑을 면직시키고 마속의 편을 든 이막은 돌려보내는 등 그야말로 일말의 관대함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막의 출세길은 막히고 만 것 같습니다.
그 점이 한스러웠던 것일까요. 6년 후 제갈량이 사망하고 촉나라 조야가 모두 애도하고 있을 때, 이막이 갑작스럽게도 유선에게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그가 저지른 세 번째 사건이면서 수위 또한 가장 높았습니다.
“여록이나 곽우 같은 신하가 반드시 역심을 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효선황제(전한 선제)께서도 신하를 죽이는 군주가 되기를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신하는 핍박을 두려워하고 군주는 위세 있는 신하를 꺼리니, 고로 간사한 싹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갈량은 강한 병력에 기대어 마치 이리나 호랑이처럼 주위를 노려보았습니다. 옛말에 권력을 지닌 자는 변방에 있지 않는다고 하였기에 신은 늘 그것을 우려했습니다. 이제 제갈량이 죽어 황실은 안전해졌고 서쪽 오랑캐들도 고요해졌으니, 대소 신료들이 모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여록과 곽우는 모두 한나라 황실에 대한 반란에 연루된 당대의 권신(權臣)들입니다. 즉 이막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러합니다. 제갈량은 나라를 찬탈할 역심을 품은 신하였는데, 그가 죽었으니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황제 유선의 대답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분노하여 이막을 하옥시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로써 이막은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결국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막은 머리가 좋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고사(古事)와 여러 기록들을 인용하면서 꽤나 멋들어지게 문장을 쓰네요.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부류의 인간이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거리낌 없이 내뱉었고, 사람들은 그 말에 불쾌함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막은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더욱 극렬하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밀어 붙었죠. 그러한 태도는 결국 스스로의 목을 날리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했습니다.
이른바 간언이나 충언은 으레 듣기 싫기 마련입니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많고 간언을 하는 사람은 적죠. 그렇기에 간언은 필연적으로 소수의 의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까지 걸고 간언하는 충신들의 사례는 종종 역사서에 기록되어 후대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착각하면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남들과 다른 의견이나 듣기 싫은 소리라 해서 그게 반드시 옳은 말인 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막은 바로 그걸 간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윗사람을 거스르는 듣기 싫은 말을 한 자기 자신을 내심 기특하게 여겼을 수도 있겠지요. 허나 결국 그건 틀린 말일 뿐이었습니다. 억지로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유비에게 했던 말은 전 주인에 대한 충절이라는 측면에서 높게 쳐줄 수 있습니다. 마속의 목숨을 구하고자 했던 발언도, 인재를 아껴야 한다는 견지에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누가 봐도 헛소리에 가까웠습니다. 그 헛소리의 대가로 지불한 것은 본인의 목숨이었죠.
안타까울 일은 아닙니다. 이막의 재앙은 자초한 것이니까요. 다만 후대의 우리들에게 조그만 교훈 하나를 남겨주었다는 면에서, 그의 죽음이 꼭 무익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일까요. 그 교훈은 이렇습니다.
‘남들과 다른 의견이라 해서 그게 반드시 옳은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