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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Jun 01. 2020

유염, 끝내 입으로 자멸한 자

삼국지의 인물들 30

  유염은 자(字)를 위석(威碩)이라 하며 예주 노국 출신입니다. 유비가 예주에 있을 때, 그러니까 대략 194년에서 198년 사이에 유비의 초빙을 받고 그 아래에서 종사로 일했습니다. 유비의 휘하에 든 시기로 보면 미축이나 손건과 엇비슷하니 나름대로 고참이자 개국공신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그는 유비와 같은 유(劉)씨였지요. 당시 중국에서 성이 같다는 건 곧 한집안 사람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유염 또한 보잘것없으나마 황실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유염은 풍류가 있었고 담론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해서 유비는 그를 아꼈으며 부하라기보다는 빈객으로 대접했습니다. 


  유비가 익주로 들어간 후 유염은 고릉태수에 임명됩니다. 이후 유선이 즉위한 후에는 제후에 봉해졌지요. 뿐만 아니라 이 시기부터 유염은 급속도로 승진하여 구경(九卿)에 해당하는 위위(衛尉)가 되었으며, 제갈량이 북벌에 나설 때는 정벌군 전체를 관장하는 중군사(中軍師)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려 후장군(後將軍)에 임명되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이후에는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는 최고위급 관직까지 차지했는데 그 관위는 항상 이엄에 버금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즉 유염은 촉한의 조정에서 제갈량과 이엄에 뒤이은 3인자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렇게 대단했던 인물이 어째서 이토록 인지도가 낮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염은 사실 딱히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그의 관직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주군인 유비는 항상 철저하게 실력에 따라 인재를 기용하였지요. 설령 공이 많은 인물이라 해도 능력이 마땅치 않다고 판단되면, 비록 높은 관위는 내렸지만 대신 실권은 주지 않는 식으로 안배를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축입니다. 익주 평정 후 미축은 명목상으로 제갈량보다 높은 최고의 지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전혀 없었습니다. 


  유염 또한 비슷한 사례로 짐작됩니다. 더군다나 그는 유비와 같은 일족이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아마도 유비가 유선과 제갈량에게 특별히 당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염은 종친이기도 하고 평소 자신과 사이가 좋기도 했으니만큼 특별히 배려해주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엄청난 대우를 설명하기는 힘들지요. 


  하여튼 유염에게 실권이 없었다는 사실은 정사에도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국정에 아예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또 엄청난 지위에도 불구하고 거느린 병사는 고작해야 천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저 제갈량을 수행하면서 가끔씩 완곡하게 의견을 내놓을 따름이었습니다. 대신 그는 먹고 마시고 입는 데 있어 무척 사치를 부렸습니다. 또 수십 명이나 되는 시비들에게 모두 노래와 악기를 가르쳤으며 노영광전부(魯靈光殿賦)라는 긴 시를 암송하도록 하는 등 온갖 호사를 누렸습니다.


  유염 스스로가 자신의 그러한 처지에 불만을 품었는지, 아니면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갈량에게 보낸 반성문을 보면 종종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사고를 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제갈량이 더러 무마해 주어서 처벌만은 면했던 걸로 보입니다. 그러니 이 지위 높은 어르신은 꽤나 다루기 힘든 골칫덩이가 아니었을까요. 




  232년. 마침내 일이 터집니다. 유염은 명목상으로나마 군대를 관할하는 중군사(中軍師)였기에 제갈량을 따라 한중에 있었는데 여기서 전군사(前軍師)인 위연과 한바탕 다툼이 일어난 겁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言語虛誕)’고 기록되어 있네요. 아마도 자신의 지위가 높음을 믿고 시비를 건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필이면 그 성질머리 더러운 위연을 상대로 말입니다. 


  그간 유염의 잘못을 덮어 주었던 제갈량도 이번에는 유염을 준엄하게 질책했습니다. 당황하고 놀란 유염은 제갈량에게 구구절절한 반성문을 제출합니다. 아마도 반성문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갈량은 그를 성도로 돌려보냈지만, 관위나 봉록은 예전과 다름없이 유지해 주도록 했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그러나 결국 유염은 더 큰 사고를 치고 맙니다. 234년 정월, 유염의 처 호씨는 궁궐로 들어가 황제와 황후에게 새해 인사를 드렸습니다. 원래부터 대신들의 아내나 혹은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태후가 호씨를 지목하여 궁내에 한 달 이상이나 머무르도록 명합니다. 유염은 더럭 의심이 들었습니다. 아내 호씨는 외모가 아름다웠는데, 젊은 황제 유선이 그런 아내를 탐하여 사사로이 정을 통한 게 아닌가 싶었던 겁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염은 사실이라고 믿었지요. 그리고 분기탱천했습니다. 아내 호씨가 돌아오자 그는 부하 병졸들을 시켜 아내를 두들겨 팹니다. 뿐만 아니라 신발로 얼굴까지 후려치고서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지요. 분개한 호씨는 유염을 고소합니다. 유염은 결국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건 단지 남편이 아내를 때린 걸로 그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염이 아내를 때린 이유는 그녀가 유선과 정을 통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유염은 백주대로에서 황제가 신하의 아내와 간통했다고 주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무척이나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재판 결과 유염은 기시(棄市)됩니다. 기시란 죄인을 죽인 후에 저잣거리에 시체를 내다버려 경계로 삼는 처벌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것으로 간주된 거죠. 여기에 덧붙여 재판하는 관리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병졸들은 아내를 때릴 수 있는 자가 아니며, 얼굴은 신발로 맞을 곳이 아니다. (卒非撾妻之人, 靣非受履之地)


  이렇게 하여 한때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라 높은 지위를 누렸던 유염은 그 삶을 비참하게 마감하였습니다. 




  유명이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는 사실 미지의 영역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유염이라는 인물을 재구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할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무척이나 불확실하지요. 그리고 딱히 어떤 교훈을 주지도 않습니다. 인맥을 잘 타면 능력 없이도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교훈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물론 실재하는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따지고 보자면 반드시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교훈이 필요하다면 한 가지 정도는 있겠습니다. 사람은 항상 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죠. 한때 담론을 잘한다는 이유로 아낌받았던 유염은 결국 허황된 말을 하다 쫓겨났으며 최후에는 속내를 감추지 못하다가 목숨마저 잃었습니다. 그러니 말이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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