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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y 14. 2020

이엄, 가장 높은 곳에서 전락한 자(2)

삼국지의 인물들 28

  저는 그런 추측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단 유비는 제갈량을 신뢰했습니다. 유선이 쓸 만하지 않거든 그대가 대신 황제가 되라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물론 이 말은 진심은 아니었을 겁니다. 촉한은 본질적으로 한을 계승한 유씨의 나라였기에, 유씨가 아닌 제갈씨가 황제가 된다면 그 순간 나라 전체가 공중분해되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보다는 내가 그만큼 제갈량을 믿는다는 걸 유선과 문무백관들에게 선언한 정치적 발언일 가능성이 큽니다. 제갈량에게 잔뜩 힘을 실어준 거죠. 


   게다가 유비는 유선에게 따로 조칙을 내리기를, “너는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고 승상을 아비처럼 섬겨라.”고까지 합니다. 조칙이란 황제로서 내리는 공적인 명령을 뜻하지요. 즉 유비는 그 자신의 강력한 의지로 제갈량에게 무한에 가까운 권위를 부여한 겁니다. 그러면 이엄의 역할은 제갈량에 대한 견제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보조에 가까웠을 겁니다. 


    게다가 이엄이라는 인물이 어느 정도의 기반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아시다시피 촉한이라는 국가는 외지에서 굴러들어온 세력이 현지의 세력가들 위에 군림하는 체제입니다. 즉 국가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은 존재는 바로 익주에 기반을 가지고 대대손손 살아온 이른바 호족들입니다. 반면 이엄은 형주 출신으로, 익주에 들어온 지 몇 해 되지 않았습니다. 황실에서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면 손가락만 빨아야 할 가능성이 높지요. 심지어 이엄은 사교성도 나쁜 편이어서 같은 형주 출신인 비관을 제외하고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즉 이엄은 내부에서 파벌을 만들 가능성이 적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제갈량을 견제할 이유보다 제갈량과 사이좋게 지내야 할 이유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엄을 성도가 아닌 영안에 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영안은 촉한의 동쪽 국경으로 혹시 모를 동오의 침범에 대비한 최전선입니다. 행정능력과 군사능력을 겸비한 자가 아니라면 이곳을 담당하기 어렵죠. 그래서 유비는 이엄을 영안에 두었고, 이후로도 이엄은 훗날 제갈량이 한중으로 불러오기 전까지는 쭉 국가의 동쪽 국경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엄은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중앙정계에서 고립된 셈이기도 했습니다. 


   또 이엄의 지위인 상서령도, 중도호도 결국 제갈량의 지휘를 받는 입장입니다. 제갈량은 승상으로서 뭇 대소신료들의 위에 있었으며 또한 녹상서사(錄尙書事)를 겸하여 상서령의 직속상관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로도 제갈량이 남중을 정벌하고 또 북벌에 나섰을 때 딱히 이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엄이야말로 명색은 안팎의 병력을 총괄하는 중도호지만 실제로는 권한이 제한되어 있어 자신이 주둔한 영안(강주)의 병력에 대해서만 권한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유비는 어디까지나 이엄에게 제갈량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겼을 뿐이라고요. 


   하지만 그로 인해 이엄은 점차 야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23년. 유비가 세상을 떠난 후 이엄은 절을 받고(假節) 광록훈(光祿勳)을 겸하게 됩니다. 권위와 지위가 더욱 높아졌지요. 이후 제갈량은 3년간 절치부심하여 국력을 기른 끝에 마침내 옹개가 중심이 된 남중의 변란을 일거에 평정합니다. 이후 226년에 북벌을 위해 제갈량은 한중으로 위치를 옮기지요. 이때 이엄은 전장군(前將軍)으로 승진합니다. 그리고 제갈량은 이엄을 영안에서 강주로 이동시킵니다. 강주는 파군의 중심지로, 익주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즉 제갈량은 자신이 북벌에 나서는 동안 이엄이 후방 전체를 관할해주길 바란 겁니다. 그만큼 이엄을 신뢰하였다 할 수 있지요. 적어도 이엄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구석진 곳에만 처박아둔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후 제갈량은 맹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엄을 가리켜 ‘일 처리가 마치 물 흐르듯 하며, 나아감과 물러남에 있어 주저함이 없다’고 극찬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제갈량은 승상으로서 국정을 돌보는 업무는 이엄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승상부를 두 개로 나누어서 각기 한중과 성도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성도 승상부의 장사(長史)로 장예를 발탁하여 자신을 대리해 승상부의 업무를 처리하도록 조치하지요. 장사는 승상에 소속된 으뜸가는 속관으로, 제갈량을 국무총리라고 하면 장사는 대충 국무조정실장쯤 됩니다. 반면 상서령은 부총리격이지요. 어쩌면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요. 이엄이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이 말입니다. 상서령인 내게 국정을 맡기지 않고 고작 장사 따위가 국정을 처리하다니, 하고 화를 냈을 법도 합니다.   


   이듬해인 228년. 제갈량은 북벌에 나서지만 마속의 크나큰 실책으로 인해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스스로 벼슬을 깎아 죄를 청하지요. 이 일은 유비 사후 처음으로 제갈량의 권위가 떨어진 대사건이었습니다. 제갈량은 명목상으로나마 우장군이 되어서 전장군 이엄보다도 오히려 한 끗 떨어지는 지위가 되었습니다. 물론 불과 1년 후에 음평과 무도를 차지함으로써 다시금 승상에 복귀하지만요. 




   230년. 이엄은 표기장군이 됩니다. 대장군이 없는 촉한에 있어 군직(軍職)으로는 가장 높은 자리였습니다. 그해 조진이 황제 조예의 윤허를 얻어 대규모 병력으로 촉한을 정벌합니다. 현대의 삼국지 독자에게는 잘 인식되지 않고 있지만 이건 촉한에 있어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위나라 종실의 우두머리이자 신하들 중 최고 실권자인 대사마 조진이 직접 군사를 지휘했고, 표기대장군 사마의와 정서거기장군 장합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병력 또한 어마어마했는데, 상세한 숫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위나라의 옹량주 방면 주둔군과 형주 방면 주둔군에다 황제 직속 중앙군까지 동원한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물론 제갈량도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한중의 요충지에 한성과 낙성이라는 두 성을 쌓아서 적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위나라가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강주에 있는 이엄에게 사람을 보내어 병력 2만을 이끌고 한중으로 오라고 합니다. 즉 이때 이엄은 적어도 2만 명 이상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단 뜻입니다.  


   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엄이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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