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인물들 28
이엄은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복잡다단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능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주인을 세 번이나 바꾸었으면서도 항상 인정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유비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아 나라의 모든 신하들 중 둘째가는 자리에까지 오르지요.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제갈량의 뒤통수를 침으로써 북벌을 좌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까지 삭탈관직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지요.
이엄은 형주 남양군 출신으로 자(字)를 정방(正方)이라 합니다. 젊어서부터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아, 당시 형주목으로 있던 유표가 그를 여러 지역의 수령으로 임명하였습니다.
208년에 유표가 죽고 조조가 남쪽으로 공격해 왔지요. 이때 이엄은 자귀현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서쪽으로 도망쳐서 유장에게 귀의합니다. 형주 관리의 대다수는 조조에게 항복했고 나머지 일부분은 유비를 따랐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엄의 선택은 다소 뜻밖입니다. 추측의 영역이지만, 아마도 이엄은 본래 유비를 따르려던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자귀라는 지역이 워낙 서쪽에 위치해 있다 보니 남쪽으로 도망치는 유비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유장에게 간 게 아닐까 합니다. 즉 애당초 조조에게 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친유비파였던 거죠.
이엄의 본심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엄은 유장에게서도 꽤나 높은 대우를 받습니다. 유장은 그를 익주의 치소 성도의 현령으로 삼습니다. 유장에게 있어 본거지나 다름없는 성도의 중요성을 감안하자면 이엄을 상당히 신뢰했던 모양이지요. 이엄은 익주에서도 여전히 능력이 있다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211년에 익주로 들어온 유비는 이듬해에 칼끝을 돌려 친족 유장을 겨눕니다. 유장은 여러 장수들을 부현으로 보내 유비를 막게 했지만 격파당합니다. 그래서 다시 면죽이라는 곳을 2차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이엄을 호군(護軍)으로 삼아 유비를 저지하도록 합니다. 그만큼 이엄을 신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엄은 오히려 유비에게 냉큼 항복해 버립니다. 그래서 비장군으로 임명되지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엄이 기회주의적인 자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유장에게 두터운 대우를 받았으면서도 배신하고 더 강한 쪽인 유비에게 붙었다는 식으로요.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엄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형주에서 도망치는 대신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았을까요? 그거야말로 출세의 지름길이니까요. 하지만 이엄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이엄이 본래 친유비파였기에 기회가 생기자 자신의 뜻대로 행동한 거라고 봅니다. 물론 다른 분들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요.
유비는 익주를 차지한 후 이엄을 흥업장군(興業將軍)으로 삼고 건위태수(犍為太守)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잠시 평화로운 시기에 나라의 법률을 만드는데 이때 제갈량, 유파, 법정, 이엄, 이적 다섯 사람이 참여합니다. 즉 이엄이 문(文)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의 진정한 능력은 오히려 무(武)에서 빛났습니다. 218년에 유비는 친히 장병들을 거느리고 한중으로 가서 조조와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때 후방에서는 반란이 빈발했는데 이엄의 관할지인 건위군에서도 마진과 고승이라는 자들이 무리를 수만이나 규합하였죠. 건위군은 수도인 성도가 위치한 촉군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반란군들을 내버려두었다가는 성도가 위기에 빠질지도 몰랐습니다.
이때 유비가 병력을 박박 긁어서 북쪽으로 간 관계로, 이엄에게는 건위군에 소속된 병사 오천 명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엄은 그 오천 명을 데리고 몇 배에 달하는 적을 상대하러 출격합니다. 그리고 일전을 벌여 마진과 고승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이로서 한때 엄청난 기세였던 반란을 일거에 평정해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나 이엄의 활약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남중 일대에 거주하는 이민족인 수(叟)족의 수령 고정이 반란을 일으켜 신도현이라는 곳을 포위했습니다. 훗날 제갈량에게 토벌당하는 바로 그 고정입니다. 그런데 이엄은 또다시 기병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고정의 병력을 쫓아냅니다.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상대로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반란을 진압하며 후방의 안전을 확보해 준 이엄의 공로가 컸던 셈이지요. 그래서 이엄은 보한장군(輔漢將軍)으로 승진합니다.
222년. 이릉에서 대패하고 영안궁(백제성)으로 물러난 유비는 이엄을 영안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사망한 유파의 후임으로 상서령(尙書令)에 임명하지요. 상서령이라는 지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하게 되는데, 내정 전반을 관할하는 지위로 실권이 상당합니다. 그 전임자가 법정과 유파였다는 점만 보아도 촉한에서 상서령이 가지는 무게감을 알 수 있죠. 이로써 이엄은 일약 중앙정계의 핵심으로 도약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꽤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승상 제갈량이 성도에서 태자인 유선을 보위하며 국정을 이끌어가는 동안, 유비는 이엄을 일부러 영안까지 불러와 중요한 직위에 임명했단 말이지요. 의미심장한 일 아닌가요?
이듬해인 223년. 유비는 병이 악화되자 유선과 제갈량을 불러 영안으로 오도록 합니다. 그리고 유조를 내리지요. 승상 제갈량으로 하여금 후계자 유선을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상서령 이엄이 보좌하도록 한 겁니다. 게다가 이엄에게 중도호(中都護)라는 지위를 부여하여 안팎의 군사를 총괄하며(統內外軍事) 영안에 주둔하도록 함으로써 이엄은 바야흐로 제갈량에게 어느 정도 비벼볼 위치까지 올라갑니다.
물론 탁고의 핵심은 제갈량이었죠. 아무리 이엄이 급속도로 승진했다 하나 두 사람간의 권위나 지위는 여전히 천지차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어쨌거나 이엄도 당당히 탁고대신의 반열에 오른 겁니다. 촉한에서 그 누구도 이엄을 얕볼 수 없게 되었지요. 아니, 단순한 지위의 고하가 아니라 실권이라는 점으로 보면 촉한에서 둘째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유비가 제갈량을 신임하지 않았기에 이엄으로 하여금 그를 견제하게 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일리가 없지는 않아요. 이엄의 어마어마한 승진 속도에다 그가 유비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권위를 보면 그런 의문이 들 법도 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죽은 후에 촉한의 제일 권력자가 될 제갈량에게 불안을 품은 유비가, 그 대항마로써 이엄을 선택한 게 아닐까요? 더 나아가 과격하게 추론해 보면, 혹시 제갈량이 성도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외방에서 군사를 이끌고 성도로 가 반란을 평정할 임무를 이엄에게 맡겼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