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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y 18. 2023

우울증으로 병가 사용이 가능합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10

제 담당 의사분도 몇 차례나 강조했지만, 업무와 연관된 스트레스 등으로 우울증에 걸렸다면 일단 쉬는 게 좋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스트레스의 원인과 격리되는 거죠. 그리고 우울증을 비롯한 질병이나 부상에 걸린 공무원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대략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단기적으로 개인의 연가(사기업에서 말하는 연차)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연가는 아무리 많아봤자 1년에 20일 남짓이므로 계속해서 쓸 수는 없지만, 당장 급한 불을 끄는 용도로는 쓸 수 있습니다. 이건 모든 공무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두 번째는 중기적인 대책입니다. 병가를 쓰는 거죠. 병가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질병 또는 부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또는 감염병에 걸려 다른 공무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을 때'이며 1년에 최대 60일까지 사용 가능합니다. 물론 무작정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의료법상 의사의 진단서를 제출하여 조직 내에서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무상 병가라는 것도 있는데, 이건 최장 180일까지 가능하지만 따로 입증자료를 제출하여 타 기관에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요건이 상당히 복잡하고 시일도 오래 걸리니만큼 일단은 제쳐 두셔도 좋습니다. 


세 번째는 장기적인 방법입니다. 질병휴직이지요. '신체나 정신상의 장애로 장기 요양을 필요로 할 때' 사용할 수 있으며 최대 2년까지 가능하지만 급여는 일부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장기간에 걸쳐 사용하는 것이니만큼 승인 요건도 더욱 까다롭습니다. 공무상 질병휴직도 있지만 병가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복잡하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위의 셋은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게 직장 동료들과의 업무 배분 문제입니다. 공무원 조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항상 결원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그 결원을 즉시 메꾸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병가나 휴직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면 남아 있는 동료들이 그 사람의 업무를 나누어서 감당할 수밖에 없지요. 이건 그 팀에도, 부서에도, 나아가 조직 전체에까지 꽤나 큰 타격이 되는 일입니다. 공무원의 업무는 이른바 법정업무라 하여 반드시 정해진 기한에 맞추어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니까요. 


게다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병가나 질병휴직이라는 제도를 악용하는 몰지각한 소수 공무원들이 있기도 합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증세를 꾸며서 거짓으로 진단서를 받아서 병가 또는 질병휴직을 쓰는 경우입니다. 물론 모든 제도는 그걸 악용하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지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병가나 질병휴직의 사용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조직 내에서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인사 부서에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저는 내심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병가를 내는 게 맞는 일인지 자꾸만 의문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일반 직원이 아니라 중간관리자인 부서장입니다. 부서장이 자리를 비운다는 건 부서 전체에 큰 영향을 줍니다. 일반적인 편견처럼 부서장이라는 자리에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그저 시간이나 떼우는 공무원은 이미 과거에나 있었던 존재입니다. 물론 지금도 아예 없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요. 하지만 예전에 비해 요즈음의 공무원 조직에서는 부서장의 역할과 비중이 무척 증가했습니다. 더군다나 부서장은 그 부서의 일반적인 업무에 있어 전결권을 가지고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위치이기에 책임이 크고, 타 부서나 기관과 협의할 때 참석해야 하는 경우도 많지요. 그렇기에 부서장이 자리를 비우면 직원들이 아예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제게는 알량하게나마 책임감이라는 게 있었고, 우울증으로 엉망진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책임감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절대 칭찬받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멍청하고 우둔한 생각이었습니다. 강조하기 위해서 한 번 더 말하겠습니다. 그 때 저는 매우 어리석었습니다. 


우울증에 걸려서 종종 발작을 일으키는 부서장이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까요? 상태가 안 좋아질 때마다 직원들이 눈치를 보게 하고, 회의를 진행하다 말고 목 졸리는 소리를 내는 부서장이 과연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요? 또 직원들이 그런 부서장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닐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책임감 운운하면서 어떻게든 출근을 하려 했으니 오히려 민폐가 이만저만 아니었겠지요.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 중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 어떻게든 자꾸만 출근하려 한다는 거죠. 아니면 주로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렇게 억지로 출근해 봤자 우울증은 낫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 악화될 뿐이지요. 그러다 최악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선택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의 저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민을 할 따름이었지요. 


그리고 때마침 바로 다음 날부터 사흘 동안 제주도 가족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한참 전,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 전부터 준비해 왔던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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