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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y 19. 2023

자신을 차분히 평가해 보았습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11

제주도 여행은 언제나 그랬듯이 아내가 여행 일정을 모두 짜고, 저는 그저 운전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덕분에 여행 준비에 심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저 공항으로 차를 몰고 가서 주차대행을 맡긴 후, 비행기에 타서, 한 시간 가량 불편한 자세로 졸다 보니, 저는 제주도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첫날은 제 몸상태를 고려한 것인지 별다른 일정이 없어서 숙소로 가서 편히 휴식을 취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곶자왈이라는 곳을 갔습니다. 숲길로 유명한 곳인데, 중간까지는 걷기 편하도록 길을 닦아 놓았고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면 다소 험하기만 걸을 만한 길이 이어집니다. 아마도 힐링 코스라는 취지에서 아내가 잡은 일정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울증이라는 병이 참 이상합니다. 분명 정신적인 질환인데도 불구하고 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거든요. 그즈음 제 체력은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 조금 오래 걷기만 해도 숨이 차오를 정도로요. 그래서 다소 걱정도 되었지만, 그날은 아침부터 상태가 꽤 괜찮은 편이었기에 저는 가족들과 함께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게 큰 실수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숲은 빽빽해졌고 하늘에서 내려쬐는 햇볕이 점점 더 가려졌습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는 여전히 아름답고, 고즈넉하며, 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쳐드는 아늑한 풍경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게는 아니었습니다. 주위가 조금씩 어두워질수록 이유 모를 불안감과 압박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체력이 떨어진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정신적인 긴장감이 차오르면서 자꾸만 숨이 가빠져 왔습니다. 남에게는 기분 좋은 산책로일 곶자왈 숲길이 제게는 점점 더 무서운 곳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자꾸 숨을 몰아쉬자 아내는 아마도 제가 체력이 떨어진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딸아이는 좀 더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저만 먼저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걱정스럽게 권하더군요.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홀로 숲길을 다시 돌아나왔습니다. 자꾸만 숨이 가빠질 때마다 멈추어서 하늘의 햇빛을 쳐다보고, 긴장이 차오를 때마다 주위가 아닌 발 아래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걷다 보니 숲길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절로 한숨이 나오면서 맥이 턱 풀리더군요. 정말이지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휴식 장소에 있는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점차 몸과 마음이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어두컴컴하게만 느껴졌던 주위의 나무들이 다시 기분 좋은 푸른빛으로 빛났고, 새가 우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도 친근하게 들렸습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간 가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저는 저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동안 계속해서 우울증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막상 저의 상태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극심한 자살 충동에 사로잡혔었고, 두 차례의 발작을 겪었으며,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산책하는 숲길에서 홀로 헐떡거리며 도망쳐 나온 직후였습니다. 이 상태로는 절대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병가를 내야겠다. 저는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일단 내가 살고 봐야겠다고. 


이대로 계속 직장에 다닌다면 저는 분명히 기존의 행동을 반복할 겁니다. 그리고 주위의 모두에게 민폐라는 이름의 똥덩어리를 던져대는 꼬락서니가 되었겠지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얼마간 자리를 비우더라도, 그 동안 회복해서 돌아가는 게 더 낫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조금은 마음이 불편해지고, 동시에 조금은 편해지더군요. 어찌 되었든 저는 제 의지로 결정을 내렸고 이제 그 결정에 따를 차례였습니다.  


다행히도 남은 여행 동안 더 이상은 발작 비슷한 경험을 겪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아내에게 병가를 신청하겠노라 말했지요. 아내의 반응은 완벽히 제 예상대로였습니다. 별다른 인사치레는 없었습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린 배우자에게 대한 격려라든지, 혹은 몹시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남편을 향한 응원 따위도 일체 없었습니다. 대신 한 마디만 하더군요. 


"그럼 당분간 시간이 날 테니 서재 좀 정리해요."


이래서 저는 아내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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