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May 17. 2023

두 번째 발작이 닥쳐왔습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09

그날 아침까지도 상태는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출근했고, 계속 그래왔듯 약을 먹은 후 잠시 차에서 쉬었다가 사무실로 올라갔습니다. 직원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지요. 


그날은 유달리 바쁜 날이었습니다. 다소 골치 아픈 자료 제출 건을 검토해야 했고, 좀 예민한 문제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인사와 관련된 안타까운 조치를 하나 해야 했고, 마지막으로 민원에 대한 처리 방향을 확정해야 했습니다. 번거로운 일이 많았고 머리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그날 제가 받았던 스트레스의 양이 우울증 상태 하에서 견딜 수 있는 임계점을 넘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발작은 처음보다 좀 덜 극적이었지만, 좀 더 음습하고 치명적이었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은 채 몸을 구부정하게 앞으로 굽히고 손으로 양 팔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몰아쉬면서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습니다.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아 신음 소리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이후로 간혹 상태가 안 좋을 때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손으로 옷깃이나 손목 따위를 꽉 움켜쥐는 일이 있곤 했습니다. 의사는 그게 긴장이 높아지면 생기는 증세라고 했습니다. 그날 제가 얼마나 세게 팔을 움켜쥐었는지, 나중에도 손이 저릴 정도더군요.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상념들이 폭풍처럼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고 제 정신은 마치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발작이 있었던 이후의 일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뭔가 회의를 했던 것 같긴 한데 무슨 회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퇴근하기 위해 차로 걸어갈 때, 친한 직원과 우연히 만났던 일은 생각납니다. 제 몰골을 보고 놀라서 자꾸만 걱정하더군요. 몸이 아픈 게 아니냐. 괜찮겠느냐. 그 상태로 운전을 할 수 있겠느냐. 심지어는 운전이 어려울 것 같으면 자신의 차로 태워 주겠다는 제안까지 해 주었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지만 당시 저는 그런 고마움을 느낄 여력마저도 없었습니다. 억지로 꾸며낸 웃음과 몇 마디의 주워섬김으로 모면한 후 차에 올라탔죠. 그리고는 저만의 작은 공간 속에서 한동안 헐떡이며 이를 악물었습니다. 




우울증은 마치 파도 같습니다. 마치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매일매일 기분이 위아래로 출렁입니다. 항상 잔잔한 파도만 밀려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거친 파도가 휘몰아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고점과 저점 사이의 낙차가 어마어마해집니다. 


두 번째 발작이 있기 전날, 제 상태는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곧장 최악으로 굴러떨어졌지요. 그 급격한 낙차가 저를 더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곧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실제로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다음날 직장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대체 어떤 정신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그날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기에도 그날의 기록은 누락이 되어 있네요. 그날의 저는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제 정신은 엉망진창으로 뒤엉켜서 몸을 떠나 있었죠. 속된 말로 하자면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습니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그저 멍했습니다. 발작은 하지 않았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제 몸이 제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감각이 절반쯤 없어진 기분이었습니다. 기계처럼 사무실에 출근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일어서서 층계참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갑작스럽게 신경이 곤두서더군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을 확인해보니 인사 담당 부서였습니다. 때마침 인사 관련해서 두어 가지 현안이 있었기에 그 일이겠거니 하고 어림짐작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미안하지만 지금 바로 논의할 게 있으니 급히 좀 보자고 하더군요.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제 생각과는 용건이 전혀 달랐습니다. 


인사 부서에서는 저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어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제게 병가를 권했습니다. 


예전부터 이런저런 질환으로 누군가가 병가나 휴직을 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인사 부서에서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제 상태가 몹시 엉망이라는 소식이 윗선에까지 전달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나온 거지요. 일단은 좀 쉬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고요. 


그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저는 일단 병가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이전 08화 조금씩 좋아진다고 생각했었는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