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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y 16. 2023

조금씩 좋아진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08

나중에 아내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방에 들어갔더니 아이는 울고 있는데, 막상 저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그저 아이를 관찰하고만 있는 것 같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 상태가 정말 안 좋은 거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일은 제게도 상당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나 자신의 공감능력이 그렇게까지 떨어져 있었던가 싶었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그 때의 제게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서운 일이었죠. 내가 문제든, 우울증이 문제든 간에.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지나고 다시 출근해야 하는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닷새의 휴식 후였기에 제게는 나름대로 큰 도전이었습니다. 회사로 출발해서 일단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아침 약부터 먹었습니다. 졸음을 유발할 수 있으니 운전하기 전에는 먹지 말라던 의사의 당부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한참 동안 차에 앉아 있다가 가슴이 답답한 게 가라앉을 때쯤 문을 열고 나와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그다지 좋은 하루는 아니었습니다. 팀장 이하 직원들은 제 눈치를 봤고, 저는 그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찾는가 싶어서 더럭 겁이 나더군요. 그날 오후에 진료가 잡혀 있어서 조퇴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사무실을 빠져나올 때 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어디서 사고가 났는지 예상치 않게 길이 막혔습니다. 막힐 시간이 절대 아닌데 말입니다. 예약 시각에 늦어질 것 같자 더럭 겁이 났습니다. 오늘 약을 받지 못하면 큰일이라는 두려움이 갑작스럽게 덮쳐오더군요. 동시에 방향 잃은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막히는 길을 향해서, 또 좀 더 일찍 나오지 못한 나 자신을 향해서 마구 분노를 퍼부어댔지요. 구체적인 건 차마 글로 적기에 민망할 정도입니다만, 어쨌거나 그렇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갑작스럽게 밀려오니 영 버티기 힘들더군요. 


천만다행으로 병원이 진료를 마치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상담 시각을 짧게 가져갈 수밖에 없었지요. 일단 약은 기존의 양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지나고, 수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지났습니다. 


매일매일 상태는 비슷했습니다. 아침에는 안 좋았고, 저녁에는 좋아지기를 반복했지요. 다시 말해서 저녁마다 내가 괜찮아진 게 아닐까 싶은 희망을 품고, 다음날 아침마다 그 희망이 박살나는 걸 반복하는 일주일이었습니다. 간신히 일은 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는 없어도 기존의 일은 힘겹게나마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욕은 여전히 없었습니다. 게임도 하지 않았고 TV도 보지 않았으며 책도 읽지 않았습니다. 오직 모바일 게임 하나만은 플레이했는데, 그게 유일하게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에 모 유명인이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날 저는 온종일 그 기사만을 반복해서 클릭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기괴하게 느껴지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되어 병원으로 갔지요. 


똑같은 일상을 자꾸 반복해서 적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의사가 다시 한 번 더 약을 좀 더 늘려 주었고, 그 덕분인지 주말쯤 해서는 상태가 좀 더 나아졌다고 요약하면 되겠습니다. 아내가 기분전환을 해주겠다면서 미용실에 데려가서는 생전 처음으로 두피 마사지도 받아보게 해 주었습니다.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나쁘지 않더군요. 역시 돈 쓰는 건 좋은 일이라며 아내랑 낄낄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 월요일에는 상태가 한결 나아졌습니다. 저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지요. 여전히 아침에는 상태가 나빴지만 오후 무렵에는 기분이 좋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조금 노력하면 남에게 멀쩡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요. 그날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 지금까지 치료해 온 과정 중에 오늘이 상태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의사도 함께 기뻐해 주더군요. 그러면서도 신중해야 하니 당분간은 지금 약을 그대로 유지하자고 했습니다. 그간 약 복용량을 늘린 게 세 차례나 되다 보니, 솔직히 저는 이제 좀 줄여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얌전히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지요. 대신 면담을 이제 일주일에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이기로 하고 그렇게 병원을 나왔습니다. 


이튿날도 마찬가지로 상태가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일도 깔끔하게 잘 처리했지요. 제 상태를 아는 직원이 저더러 예전이랑 똑같아 보인다고 하더군요. 저는 농담따먹기로 응수하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 후 퇴근했습니다. 거의 '기분이 좋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유감스럽게도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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