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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y 27. 2023

우울증과 '기대'와 '잘못'에 대해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18

지난 번 글에도 썼지만, 심리 상담을 진행하면서 저는 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고 있습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내면에 대한 통찰이라 할 수 있겠고, 평이하게 말하자면 저 자신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과정입니다. 


그중 가장 문제였던 점은 바로 타인의 '기대'에 대한 저의 인식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꽤 똘똘한 축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제 집안은 친척들끼리 사이가 가까운 데다 유교적 가풍이 무척 강했지요. 추석이면 큰집에 대략 사십 명쯤 모이는 그런 집안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저는 집안의 기대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명절마다 공부를 잘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덕담 아닌 덕담을 무수히 들었지요. 


게다가 아버지는 제가 성적표를 받아올 때마다 담배를 연달아 뻑뻑 태우면서 계산기로 제 전국 석차와 서울대 입학 가능성을 계산해본 후 흡족하지 못하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탄식을 내뱉고, 흡족하면 더 열심히 하라는 근엄한 설교를 늘어놓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철이 들고 난 이후 성적으로 칭찬을 들었던 적은 단 한 번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전교 1등을 했을 때였죠.


고등학교 3학년이 될 즈음에는 저를 향한 아버지의 기대가 극심해졌지요. 저는 그런 상황이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라 아주 엇나가지는 않았지만, 대신 저는 아예 공부를 손에서 놓아 버렸습니다. 저의 3학년 1학기 때 내신 성적표는 영어가 가, 수학이 양이었습니다. 집에서는 밤을 새워 게임을 하고 학교에서는 잠을 자거나 혹은 무협지만 보았으니 당연한 귀결이었지요. 그러다 2학기 때 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이른바 SKY에 들어갔지만, 아버지가 중고등학교 내내 노래를 부르시던 서울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제 내면에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요. 제가 먼저 기대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무의식중에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건 '잘못'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마다, 저는 좌절했습니다. 


시험 점수가 낮은 것이 나쁘거나 잘못된 일일까요? 아닐 겁니다. 점수의 고하는 잘잘못의 영역에 있지 않지요. 하지만 저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부모와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험 점수가 낮은 건 잘못이라고 생각했지요. 


더 나이가 들어 회사에 들어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단 직원일 때도 내게 주어진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직이 저에 대해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팀장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직이 저에 대해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서장이 되어서도 그랬지요. 내가 이런 직위에 있으면 당연히 이러이러한 기대가 있을 테니 그걸 만족시켜야 한다고, 그런 식으로 저는 스스로를 힘껏 채찍질하면서 일해 왔습니다. 


그게 아마도 제가 비교적 빠르게 승진한 원인인 동시에, 우울증을 초래한 주요한 원인이었을 거라고 지금의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면 기대를 항상 충족시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을 잘못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머리는 삼단논법에 따라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처벌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우울증 증세가 가장 극심했을 때, 저는 저의 업무상 잘못으로 인해 제가 죽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진심으로, 일말의 의심조차 없이.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애당초 그러한 기대 자체가 실존하는 것이었을까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단지 저 스스로 타인의 기대를 만들어낸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에 대한 기대가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요. 제 상사든 아니면 직원이든 간에, 부서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저에게 일정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아마도 그런 기대를 원래보다 더 과장하여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인식하고 부담을 느끼고 있던 기대의 상당 부분은 아마도, 저 스스로가 마음 속에서 창조해낸 허상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쌓이면서 제게 매우 나쁜 영향을 끼쳤지만, 그 좌절감 자체가 실은 근본도 없이 생겨났던 것이었죠.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건만 스스로 마음 속에서 창조해낸 나 자신에 대한 기대는 계속해서 커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 자신이 만들고 점점 더 크게 키워낸 거대한 허상과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언젠가는 패할 수밖에 없었고 저는 당연히 패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울증으로 나타났고요. 


에전부터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이제는 좀 내려놓으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 와서야 그게 정말로 무슨 의미였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타인의 기대를 이유로 저 스스로를 질책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노력해 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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