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May 29. 2023

우울증과 '책임감'과 '인정'에 대해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19

예전에 경력이 얼마 되지 않고 직급도 낮은 직원에게 새로운 업무를 주었습니다. 그 직원은 일주일 후에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제게 보고를 했습니다. 다른 기관의 사례를 분석했고,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한 흔적도 엿보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상당한 혼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망치면 어떡하나 하는 깊은 걱정이 숨김없이 드러나더군요. 그래서 저는 직원에게 말했습니다. 


"주임님은 아직 직급이 낮고, 그래서 감당해야 할 책임도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일을 주임님께 맡긴 겁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주임님이 이 일을 완전히 망쳐버려도 괜찮습니다. 제가 그래도 괜찮은 범위 안에서 일을 준 거니까요. 중요한 부분은 제가 핸들링할 거니까 주임님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적어 놓고 보니 되게 잘난 척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저는 진심이었습니다. 9급 공무원이면 주어지는 책임의 무게도 가장 가벼워야 하는 게 정상입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월급을 주는 건 단지 그 사람이 오래 근무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만큼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무겁기 때문에 급여도 많이 주는 겁니다. 


문제는 그러면서 제가 저 자신의 책임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무겁게 인식하고 있었던 데 있습니다. 저는 제가 '직급이 높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책임감을 가지고 훨씬 더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물론 책임감이 더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멍청하게도 그 책임감을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무겁게 받아들였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부서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수나 잘못은 모두 부서장인 나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책임감을 가지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실수나 잘못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한 부서에 속한 이십여 명의 업무를 모두 컨트롤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한낱 부서장 따위가 어찌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들도 있지요. 그러니만큼 저는 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그 한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는 게 올바른 마음가짐이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았고, 지나칠 정도로 과도하게 책임감에 매달렸으며, 결과적으로 사방팔방에 민폐를 끼치면서 장렬하게 자폭하고 말았습니다.  


남에게는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주제에, 저 스스로는 과다한 책임감 때문에 이 꼴이 되었으니 정말이지 앞뒤가 안 맞는 행동입니다. 부끄럽네요. 뭐든 적당한 게 좋은 법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순적인 행동은 저의 인정 욕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지난번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심리 상담 초기에 상담사분이 저더러 인정욕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좋은 결과를 내서 타인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욕구가 강하다는 뜻이지요.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어쩌면 제가 지닌 책임감은 책임감이라는 듣기 좋은 단어로 포장되었을 뿐 실상은 단지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를 봐 줘! 나는 이렇게 잘난 사람이야! 이렇게 일도 잘하는 사람이야! 이렇게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를 인정해 줘! 나를 칭찬해 줘! 내가 잘났다고 말해 줘! 뭐 그런 거지요. 


물론 저는 압니다. 세상에 잘난 사람은 너무나 많고, 그들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요. 정말이지 '천재'라는 수식어가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일을 잘하는 공무원도 겪어 보았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일을 잘하나' 싶은 직원과 함께 일해 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며칠 동안이나 처리하지 못한 일을 다른 사람이 순식간에 해내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내면에 있는 저 자신은 끊임없이 인정을 갈구하고 있지 않았나,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바로 지난 글에서 언급한 '타인의 기대'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킨다면 그 사람은 저를 인정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어른이 덜 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타인의 인정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의 자존감을 쌓아올릴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면에서 아직 미성숙한가 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자기계발서 따위에서 항상 언급되는 말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인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도, 글을 통해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해서가 아닌가.... 싶어지기도 하는 오늘입니다. 

이전 06화 우울증과 '기대'와 '잘못'에 대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