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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05. 2019

조조의 세 아들 (3)

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03

  자. 조식이 무슨 사고를 쳤는지에 앞서, 먼저 정사의 구절을 조금 찾아보겠습니다. 위서 진사왕식전을 찾아보면 조식에 대한 칭송이 실로 대단합니다.


나이 십여 세에 시경과 논어 십만 자를 외웠고 문장을 잘 지었다. [위서 진사왕식전]
성격이 까다롭지 않고 위엄 있는 척하지 않았다. 수레와 말과 의복도 화려하게 하지 않았다. [위서 진사왕식전] 
조조에게 어려운 질문을 들어도 바로 대답하니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위서 진사왕식전] 
타고난 성정에 따라 일을 행하고 스스로를 꾸미려 하지 않았다. [위서 진사왕식전]


 이 정도면 거의 극찬에 가깝지요. 조조가 그를 사랑한 것도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마디가 덧붙어 있습니다.  


   술 마시는 데 절제가 없었다.(飲酒不節) [위서 진사왕식전]


  사서에 명확히 기록될 정도면 그의 술버릇은 워낙 엉망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어느 날 조식은 수레에 탄 채 치도(馳道)를 따라 사마문(司馬門)을 열고 나갑니다. 치도란 말하자면 궁궐의 정문에서 궁궐까지 쭉 이어지는 큰길입니다. 이 길은 천자나 혹은 천자를 대리하는 자만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사마문은 그 중간에 있는 문이고요. 치도를 따라 지나갔다는 것, 더군다나 수레를 타고 갔다는 건 거의 역적질이나 다름없는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장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은 행동이죠. 


  조식이 저능아가 아닌 다음에야 그 사실을 몰랐을 리 만무합니다. 그렇기에 후세 사람들은 조식이 술을 퍼마시고 사고를 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조비가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식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 일로 인해 조조는 크나큰 충격을 받습니다. 조식 이 녀석이 내 총애를 믿고 이토록 방자한 짓을 하다니! 싶었던 거죠. 


  그래도 차마 아들의 목을 베어 버릴 수는 없었던 조조는 대신 궁문을 담당하는 관리인 공거령(公車令)의 목을 날려버립니다. 이후 조조는 이렇게 말하며 한탄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 아이들 중에서도 조식이 가장 큰일을 결정할 만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사로이 사마문을 열고 나가 금문에까지 이르렀으니 그로부터 나는 이 아이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즉 그날부터 찍혔다는 이야기입니다. 


  누누이 언급했다시피 적장자라는 명문이 없는 조식이 조비와 경쟁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아버지의 총애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잘못으로 인해 단숨에 그 총애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내리막길뿐이었습니다. 


   217년 겨울. 조조는 위왕에 등극한 지 일 년 반 만에 조비를 태자로 정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조비는 얼마나 기뻤던지 곁에 있던 신비의 목을 껴안고 펄떡펄떡 뛰면서 말합니다. “그대는 제가 얼마나 기쁜지 아십니까?” 집으로 돌아간 신비는 딸인 신헌영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죠. 그러자 신헌영은 탄식합니다. “태자는 왕을 대리하여 종묘와 사직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왕을 대신하는 것은 근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걱정하는 대신 기뻐한다 하니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위나라는 번성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신헌영은 훗날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켰을 때 조상의 부하로 있던 동생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 주어 목숨과 명예를 구해 주고, 또 종회의 반란을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태자를 정했음에도 조조는 여전히 조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본래 임치후(臨菑侯)로 있던 조식의 식읍은 5천 호였는데 이걸 두 배로 늘려 1만 호로 만들어주죠. 이는 그 1만 가구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나라가 아닌 조식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겁니다. 조조는 여전히 다섯째 아들을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조식에게는 희미하게나마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해 말에 유비가 하변을 공격했습니다. 한중 전투의 서막이 열린 겁니다. 그러나 조조는 즉각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이듬해인 218년 1월에 허도에서 길본과 경기, 위황 등이 주도한 반란이 일어났거든요. 뒤이어 4월에는 멀리 북쪽 유주에서 오환족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서쪽과 남쪽과 북쪽에서 연달아 일이 터지니 조조도 어지간히 힘들었을 겁니다. 


   여기서 그동안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넷째 아들 조창이 드디어 등장합니다. 조조는 조창을 북중랑장(北中郎將)으로 임명하고 효기장군을 대행(行驍騎將軍)하도록 하여 북쪽으로 출병시킵니다. 조조가 신뢰하는 아들 조창은 그 믿음에 보답하죠. 직접 선두에 서서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등 맹활약한 끝에 적을 박살 내 버립니다. 이때 부하들이 무작정 돌격하는 그를 뜯어말린 적이 있습니다. “장군! 지금 너무 멀리 진군해 와서 병사들과 말이 모두 피로한 상황입니다. 또 아직 대(代. 지명)를 지나가도 좋다는 명령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 명을 어기고 적을 가벼이 여겨 진격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대한 조창의 대꾸가 실로 걸작입니다.  


  “군사를 이끌고 가는 것은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얼어 죽을 명령인가? 오랑캐가 도망쳤지만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추격하면 반드시 무찌를 수 있다. 명령을 지켜 적을 놓아준다면 어찌 훌륭한 장수라 하겠는가. 늦게 출격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위서 임성위왕창전]  


  그렇게 득달같이 적을 추격하여 마침내 크게 대승을 거두었고, 즉시 장수와 병사들에게 규정의 두 배에 달하는 상을 지급하여 그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이렇게 하여 금세 오환족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지요. 신상필벌(信賞必罰)이 확실한 걸 보면 조창도 역시 그 아버지의 아들답다 싶습니다. 


  이렇게 북쪽과 남쪽의 반란을 정리한 후 마침내 조조는 일생일대의 맞수인 유비와 대결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조조는 결국 패배하여 돌아오고 말지요. 이는 조조의 인생을 통틀어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대패였습니다. 


  더군다나 한중에서의 패배는 단순한 패배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조조의 위왕 등극 이후 그를 역적이라 여기며 불만을 가진 세력이 많았습니다. 조조가 패하자 이들이 삽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지요. 그들 중 일부는 관우와 결탁하여 조조를 괴롭혔고, 심지어 위나라의 수도인 업에서도 명문가와 고관대작의 자식들까지 가담한 모반 시도가 적발되는 지경이었습니다. 여기에 관우가 북상하면서 양양과 번을 포위하며 천하를 진동시키자 조조는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자신의 늙은 몸도 예전 같지 않음을 그는 직감했지요. 


  그렇습니다. 조조는 더 이상 자신의 후계구도를 불안정하게 놓아둘 여유가 없었습니다. 


  219년 가을. 조조는 회군하던 도중 조식의 오른팔이었던 양수를 주살합니다.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고 제후들과 사사로이 교류한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양수의 나이 마흔다섯. 그는 죽을 때 담담하게 말합니다. “나는 본래부터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잠시 면하고 있었을 뿐이다.(我固自以死之晚也)” 어쩌면 그는 처음 조식의 편에 섰을 때부터 그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른팔이자 스승을 잃은 조식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일은 오직 진탕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죠. 그리고 그 술로 인해 조식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마저 스스로 끊어버리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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