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인물들 25
위연은 자를 문장(文長)이라 하며 형주 남양군 의양현 사람입니다. 211년에 유비가 익주로 들어갈 때 부곡(部曲)으로 함께 따라갔는데, 부곡이라 함은 당대의 세력가나 호족 등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 집단을 뜻합니다. 즉 위연은 유비에게 속한 직할부대의 일원이었지요. 출신지로 미루어보아 유비가 신야에 있을 때 휘하에 든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저 짐작일 뿐입니다. 그가 아예 말단 병졸이었는지, 아니면 그래도 하급지휘관 정도쯤 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그의 지위가 다른 이들에 비해 보잘것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비가 유장과 삼 년간 전쟁을 벌이는 동안 용맹하게 싸우면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워 지위가 나날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임명되어 장군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본래 부곡 출신이었던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승진인 셈입니다.
양의는 자를 위공(威公)이라 하며 형주 양양현 사람입니다. 본래 조조가 임명한 형주자사 부군 휘하에 있었지만 스스로 자리를 걷어차고 남쪽의 관우에게 갔습니다. 대략 214년에서 218년 사이의 일로 짐작됩니다. 관우는 처음에 그를 자신의 공조(功曹)로 삼았고, 이후 유비에게 사자를 보낼 때 그를 발탁했습니다. 아마도 꽤 똘똘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요. 하지만 양의는 형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유비가 사자로 온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누어본 후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얻었다고 크게 기뻐하며 좌장군부의 병조연(兵曹掾)으로 삼아 버렸거든요. 대략 좌장군 유비에게 직접 속하여서 군사에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는 팀의 팀장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듯 두 사람은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위연은 보잘것없는 지위였는데도 뚜렷한 공을 세우자 급속한 승진으로 보답받았습니다. 양의 또한 유비에게 능력을 인정받자마자 곧장 요직을 꿰찼습니다. 유비는 평생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능력 위주의 인사를 단행해 왔는데, 물론 그 으뜸가는 사례는 제갈량이겠지만 위연이나 양의 역시도 그에 버금갈 정도는 됩니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위연은 진원장군(鎭遠將軍)에 임명되고 양의는 상서(尙書)가 됨으로써 재차 승진합니다. 특히 위연은 장비마저 재끼고 최고 요충지인 한중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맡을 정도로 유비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후 유비가 죽고 제갈량이 국정을 관장할 때도 두 사람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군사를 지휘하여 적과 싸우고 또 사졸을 양성하는 일은 위연이 으뜸이었고, 각 부대에 임무를 배분하고 물자를 보급하며 명령서를 작성하는 건 양의가 최고였습니다. 하여 마침내 위연은 승상사마(司馬)가 되고 양의는 승상장사(長史)에 오릅니다. 이는 승상 제갈량에게 소속된 관원들 중 각기 군령(군사작전)과 군정(군사행정)의 최고 책임자라는 의미입니다. 촉한에서 제갈량의 위상을 생각해 보면 그 실권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만큼 위연과 양의의 능력은 출중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공통되는 매우 큰 단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격이 지랄 맞다는 점이었지요. 두 사람은 모두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야말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네 글자가 이보다 잘 들어맞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연은 사람됨이 워낙 오만하여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할 정도였으며, 자신의 건의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관이자 국가의 이인자인 제갈량을 가리켜 겁쟁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양의 또한 성미가 급하고 편협하여 남들과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직속상관인 유파와 대판 싸운 끝에 좌천된 적조차 있었습니다.
이런 두 사람을 한데 모아놓았으니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갈량의 승상부는 매번 서로 싸움박질하는 두 사람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었지요. 관위나 직급으로 보면 위연이 분명 위에 있었지만, 양의는 상대가 자신보다 상관이라 해서 굽히고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 삼국지에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위연은 사졸을 잘 기르고 용맹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또 성격이 오만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했다. 오직 양의만이 그에게 양보함이 없어 위연이 몹시 분노했는데 마치 물과 불 같았다. [촉서 위연전]
제갈량은 양의의 재간을 매우 아끼고 위연의 용맹함에 의지하였다. 항상 두 사람이 불화하는 걸 한스러워하며 차마 어느 한쪽 편을 들어 다른 쪽을 버리지 못했다. [촉서 양의전]
전군사(前軍師) 위연과 장사(長史) 양의가 서로 증오하니, 함께 앉을 때마다 매번 논쟁했다. 위연이 간혹 칼을 쥐고 양의를 죽이려 들기도 했고 양의는 얼굴 가득 눈물을 흘렸다. [촉서 비의전]
손권이 대취하여 비의에게 말했다. “양의, 위연은 더벅머리 소인배들이오. 비록 보잘것없는 재주로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지만 이미 중임을 맡은 지 오래되어 세력이 작지 않으니, 만약 제갈량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게 된다면 반드시 큰 화가 생길 것이오.” [촉서 동윤전 주석 양양기]
글로 적힌 내용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 짐작이 갈 정도입니다. 다행히도 제갈량의 생전에는 그가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공평하게 대해 주었으며, 또한 비의처럼 성격이 서글서글한 사람이 사이에 끼어들어 서로를 화해시켰기에 이런 다툼이 극한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234년. 제갈량이 북벌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눈을 감자 두 사람의 대립도 결국 파국을 맞이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