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인물들 25
제갈량이 촉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그가 죽은 후에도 전쟁을 지속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죽기 전에 은밀히 장사 양의, 사마 비의, 호군(護軍) 강유 등과 함께 군사를 후퇴시킬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 방침에 따르면 위연이 가장 뒤에서 추격병을 막고 강유가 그 뒤를 받칠 예정이었지요. 거기에 덧붙여서 만일 위연이 명령을 따르지 않더라도 그대로 후퇴하도록 지시합니다. 이를 보면 제갈량은 이미 자신이 죽은 후 위연이 제멋대로 행동하리란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갈량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양의는 위연에게 비의를 보내 후퇴 계획을 전하도록 합니다. 제갈량이 생전에 남긴 계획인 이상 위연이 제아무리 잘났다 해도 당연히 따라야만 하는 명령이었지요. 그러나 위연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뻗댑니다.
“승상은 비록 죽었지만 나는 건재하오. 승상부의 가까운 관속들은 돌아가 장례를 치를 수 있겠지만 나는 응당 군을 이끌고 적을 공격할 것이오. 어찌 한 사람의 죽음으로 천하의 일을 그르칠 수 있겠소? 더군다나 이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시에 따라 후방을 끊는 장수가 되겠소!”
당시 위연은 전군사(前軍師)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이었고 절을 받은(假節) 데다 남정후(南鄭侯)로 봉해지기까지 하여, 오장원에 있었던 인물들 중 지위가 제갈량 다음으로 높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제갈량의 일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혼자만의 착각은 둘째치더라도, 제갈량이 생전에 남긴 명령까지 어기면서 멋대로 행동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게다가 위연은 자신의 말을 즉시 실천에 옮깁니다. 내친김에 돌아갈 부대와 남을 부대를 마음대로 정하고 그 문서에다 비의가 서명을 하게끔 강요한 것이죠. 아예 작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겁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비의는 위연의 말을 따르는 척하다가 그를 속여 넘기고는 도망칩니다. 비의에게서 위연의 반응을 전해 들은 양의는 위연을 배제하고 후퇴 준비에 착수합니다.
한편 양의가 자신을 무시하고 후퇴를 강행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위연은 엄청나게 분노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끄는 군사들을 데리고 먼저 남쪽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는 엄청난 짓을 저지릅니다. 오장원의 병력이 후퇴해야 할 통로인 잔도(棧道)에다 불을 질러서 태워버린 겁니다. 이로서 촉한의 군사들은 퇴각로를 잃은 채 적진 한복판에서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아군을 통째로 전멸시킬지도 모를 끔찍한 이적행위였습니다.
다행히도 촉한의 본대는 양의의 지휘 하에 산의 나무를 베어서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며 간신히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위연은 이미 남쪽으로 가서 통로를 막고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군과 맞서 싸울 준비까지 했습니다. 제갈량이 눈을 감자마자 바야흐로 내전이 일어날 지경이 된 겁니다. 동시에 위연과 양의는 각자 성도로 표문을 올려서 상대가 반역했다고 고발합니다. 당황한 황제 유선은 제갈량이 믿을 수 있는 신하라고 말했던 장완과 동윤을 불러서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장완과 동윤은 모두 위연이 반역한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위연이 평소 인망을 얻지 못한 게 그 지경이었습니다.
심지어 위연의 직속 병력들마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양의는 왕평을 내세워 위연에게 맞서게 했는데, 왕평의 준엄한 꾸짖음에 위연의 군사들은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고는 모조리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홀로 남게 된 위연은 자식들과 함께 한중으로 달아납니다만 그를 추격해 온 마대에게 붙잡혀 목이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위연과 양의의 오랜 대립 끝에 최후의 승자는 양의로 정해졌습니다. 비록 상처뿐인 승리였지만요. 양의는 위연의 수급이 도착하자 그 머리통을 짓밟고 종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위연의 삼족마저 멸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치졸함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입니다.
하지만 양의도 결국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양의는 위연의 반란을 진압했으니만큼 제갈량의 지위를 당연히 자기가 이어받을 것이라 자신했습니다. 비록 자신 말고도 또 한 명의 장사(長史)인 장완이 있었지만, 자신이 예전부터 장완보다 지위가 높았고 나이도 많았으며 또 직접 제갈량을 수행하여 힘든 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여긴 것이지요. 또 자기 능력이 장완보다 낫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어쩜 이토록 위연과 똑같은 사고방식인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네요. 아무래도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빴던 건 동족 혐오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갈량의 본의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예전부터 양의의 성미가 급하고 편협하다 여겼기에 그를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은밀히 유선에게 표를 올려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뒷일은 장완에게 맡기라고 아뢰었지요. 제갈량이 죽자 유선은 그 말대로 장완에게 실권을 줍니다. 양의는 비록 중군사(中軍師)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별다른 실권 없이 그저 한가롭게 지내야 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양의는 원한과 울분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매일 욕설을 퍼붓고 성질을 내기 일쑤였는데, 그렇잖아도 성격이 나쁘던 그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전부터 그와 위연을 화해시키던 비의만이 그를 찾아가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양의는 너무나 원망이 가득 찼던 나머지 이런 말을 내뱉고 맙니다.
“지난날 승상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내가 군사를 들어 위나라에게 가져다 바쳤더라면 내 처지가 어찌 지금처럼 추락했겠소! 아무리 후회해도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외다!”
아무리 비의의 성격이 좋다 해도 그런 역적이나 다름없는 발언까지 눈감아줄 수는 없었습니다. 비의는 그 말을 유선에게 고했습니다. 유선은 그의 벼슬을 박탈하고 한가군으로 내쫓아 서민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양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유배를 간 곳에서 표를 올렸는데 너무나도 격렬하게 남을 비방하였기에 유선은 그를 잡아가 두도록 합니다. 끝내 양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제갈량의 왼팔과 오른팔 같았던 두 유능한 인물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었기에 그 누구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무척이나 유능한 인재였지만, 그들의 성격적 결함은 그런 장점마저 죄다 가려버릴 정도로 치명적인 단점이었습니다.
제갈량의 생전에는 두 사람을 제어하면서 적재적소에 쓸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제갈량이 워낙 대단한 인물이었던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자 아무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위연과 양의는 서로를 파멸시키려 들었고, 그 와중에 나라가 결딴날 뻔한 위기마저 있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공멸한 후에야 비로소 촉한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을 뛰어넘는 저열한 품성을 지닌 자들. 마치 서로를 거울에 비춰보는 것과 같았던 위연과 양의. 두 사람의 생애에 대해서는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평가를 내린 바 있기에 그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화를 불러들이고 허물을 취함이 스스로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 [촉서 유팽요이유위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