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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대리 Apr 26. 2023

일을 위해 사비를 쓰고, 날밤을 새고, 마음을 써본 적

없다. 그러니 내가 아직 novice로 머무는 거겠지.

두 달 뒤면 남자친구와 함께 스튜디오에 가서 모바일 청첩장에 넣을 웨딩 사진을 찍어야 한다.


지난달에 난생처음 바디프로필 사진을 찍으며 작위적인 포즈와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짓느라 두 시간 동안 고생을 한 나는 두 달 뒤 최대한 멋진 웨딩 사진을 건지기 위해서는 무조건 미리 남자친구와 데이트 스냅을 찍으며 포즈든 표정이든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스냅 업체를 고를까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우연히 한 작가님이 #무료데이트스냅모델을 구하시는 걸 발견했고, 몇 번의 DM 끝에 작가님이 우리 커플에게 몸만 가면 사진도 예쁘게 찍어주시고 보정본도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주셨다.


하여, 지난 주말 남자친구와 블랙 앤 화이트로 옷을 맞춰 입고 촬영 장소인 노들섬으로 향했다. 작가님이 사실 미리 어떤 느낌으로 사진을 찍어주실 거니 포즈나 표정을 연습해오라며 샘플 사진들을 전달 주셨었는데, 작가님께는 죄송하지만 대답만 알겠다고 했지 '알아서 다 잘해주시겠지'라는 마인드로 연습은커녕 주신 샘플들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다.


내가 작가님께 웬만하면 노들섬에서 촬영하자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남자친구는 노들섬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고 있고, 나 역시 어차피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는 방문해야 하는 동네이기에 우리 커플은 약속 시간 10분 전에 집에서 나와 털래털래 노들섬으로 걸어갔다.


그에 반해 작가님은 안양에서부터 차를 끌고 올라오셔서, 주변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리가 도착하기 한참 전에 미리 노들섬을 한 바퀴 둘러보시며 촬영하기 좋은 스팟과 기차가 얼마 만에 한 번씩 지나가는지, 어디에 더 물과 가까이 갈 수 있는 계단이 있는지 등을 세세하게 알아봐 놓으셨다는 걸 촬영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도 작가님은 어디를 쳐다보면 좋을지, 얼마나 웃어야 적절할지 등 가이드를 너무나 잘해주셔서 우리는 한 시간이 10분처럼 느껴질 정도로 수월하고 유쾌하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고, 일방적으로 셔터만 누르시는 게 아닌 중간중간 렌즈와 화면을 우리에게도 보여주시면서 더 찍고 싶은 컨셉이나 촬영 스팟이 없는지 피드백도 구하셨다.


우리 커플은 다리 위부터 시작해 벤치, 풀숲 등 10개의 스팟에서 30여 가지 포즈의 사진들을 찍었고, 작가님은 작업실로 돌아가신 후 보정을 거쳐 대여섯 개의 완성본을 보내주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안양에 도착하셨을 시간이 아님에도 한 두 개의 사진을 선별해 보내주신 걸 보면 카페 같은 곳에 가셔서 1차로 사진을 보신 뒤 퇴근을 하신 것 같다. (추가로 나머지 사진들은 작업을 거쳐 당일 새벽에 모두 보내주셨다.)


작가님의 본업은 기업 소속 사진사이시고, 역시 사진작가인 아내분과 함께 앞으로 데이트 스냅 사업을 하시려는 목표로 이렇게 우리 같은 무료 모델을 촬영한 사진들을 포트폴리오화 하시는 거라 설명해 주셨는데, 나는 이런 작가님과 함께한 한 시간 동안 미리 웨딩 촬영을 연습했다는 뿌듯함 외에 더 많은 것들을 느꼈다.


나는 작가님처럼 내 일에 저만한 열정을 쏟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열정을 쏟는단  정량화하자면 작가님처럼 자의로 기름 값을 쓰고, 주말을 할애하며, 밤을 꼬박 지새워 내 일에 마음을 쓴 적이 있는 지를 살펴보면 될 텐데, 가슴에 손을 얹고 이 수식을 나에게 적용한다답은 No다.


돌이켜보면 20대 초반 일요일, 클럽에서 밤을 새우고 회사를 바로 출근한 적은 있었고(출근 안 하면 잘리니까ㅎㅎ), 내가 리소스 분배를 잘 못해서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마무리 짓기 위해 무박으로  장표를 만든 적은 있는 것 같다.


지만 이렇게 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해낸 일들 외 내가 맡은 업무에 대한 이해도를 좀 더 높이기 위해 주말에 전시회를 간다거레퍼런스찾으내 여유 시간을 쓴 적이 있었나? 역량 강화를 위한 사외 교육도 회사에서 교육 시간을 부여해 준다고 하고, 비용 지원이 가능하다고 했을 만 억지로 가서 먼 산을 보고 앉아있지 않았나?


물론 작가님은 저렇게 쏟아부은 열정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근미래에 본인 유명세의 증가, 요청 오는 스냅 촬영 건의 폭발 등 본인의 커리어나 수입 증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돈도 쓰고, 시간도, 연휴도 할애하셨을 테지만 아직 덕업 일치까지는 못 이룬 나로서는 일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의 발전보다는 회사의 주가 상승에만 기여한다는 생각이 더 커져서인지 산소 호흡기만 아슬아슬하게 붙인 수준으로만 일을 대해왔다.


이렇게만 살아와도 여태껏 8년 간 회사에서 크게 욕 안 먹고 잘리지도 않고 있으니 앞으로 과장, 차장, 팀장이 되어서도 운이 좋다면 좀 더 센 산소 호흡기로만 업그레이드한다면 정년퇴직 때까지 다닐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럼 나는 야간 대학원은 애초에 왜 갔으며, 업계 사람들이 모인 모임은 왜 주기적으로 나가며, 일에 대한 내 생각은 브런치에 왜 그리고 무슨 목적을 가지고 적고 있는가?


이 업계에서 나름 influencer가 되고, 신문사에서 기고도 가끔 부탁받고, 영향력 떨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모호한 목표 하에 혹시 누가 내 글, 의견을 보고 날 발탁하지 않을까?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어놓아야 해!라는 생각으로 앙꼬 없는 활동만 하고 있지 정작 influencer라면 갖춰야 하는 업에 대한 기본 지식은 티타임에, 워크샵에 쉴 거 다 쉬며 일하는 정규 근무시간 9to6 에만 쌓고 있는 것이다.


마침 1on1을 하며 본부장님으로부터 연초의 열정이 사라진 것 같다는 피드백을 들으셨다는 우리 팀장님께 내가 생각하는 열정의 척도를 날밤 새기, 주말 쓰기, 사비 사용이라고 말씀드리니 적극 공감하시며 그날 바로 22시까지 야근을 함께 한 당황스러운 사건도 있긴 했지만ㅎㅎ


앞으로 남은 30년의 회사 라이프에서 조금이라도 내가 되고자 하는 목표에 가까워지려면 오늘부터라도 내가 맡은 이 앱이 사용자를 좀 더 얻으려면 어떤 마케팅 수단을 쓸 수 있나, 경쟁사는 어떤 신사업을 추진하나, 이 업계에 지금 이슈는 무엇인가를 누가 지시하거나 묻지 않아도 내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밥 먹듯 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너무 좋아해서 매일 3잔씩 마시는 카페 모카 대신 이런 일에 대한 열정을 먹는 날들이 하루, 이틀, 10년 쌓이고 나면 매주 한번씩 신문 맨 마지막 장 기고란 고정 슬롯을 받을 순 없어도 적어도 스스로 물경력이라는 생각으로 자괴감에 빠지거나 작가님 같은 열정남을 마주했을 때 최소한 나 자신이 부끄럽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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