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순위 채용
남편은 여행을 갈 때면 내가 비행기에서 신을 슬리퍼를 미리 챙겨준다. 같이 쉬는 주말에는 지나가듯 말했던 데이트를 떠올려서 제안한다. 내가 출근한 사이 이불 빨래를 해놓고, 물이 고이지 않는 비누받침을 사놓는다. 출근할 땐 한 시간 반 전에 출근할 정도로 성실하고, 칭찬 일색의 피드백을 받아도 겸손하다.
나에게 다정하고, 본업도 잘하고, 가사에도 능숙한 사람이라면 최고의 배우자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럼 이 배우자는 언제부터 이렇게 최고였을까?
채용을 하다 보면 가장 맘에 드는 후보자가 우리 회사를 선택하지 않는 순간이 온다.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후보자는 다른 사람들도 괜찮게 여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고, 다른 회사의 제안이 우리가 내세운 조건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 이런 경우, 때로는 2순위로 고려하고 있던 후보자에게 입사를 제안하게 된다.
2순위 후보자라고 해서 결함이 많은 것은 아니다. 단지 1순위 후보자에 비해 특정 스킬이나 연봉 수준에서 약간의 우려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2순위 후보자도 업무 수행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여전히 훌륭한 인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당 포지션에서 최우선으로 고려된 후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입사를 설득하면서 1순위 후보자가 입사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려고 한다. 전형 발표가 늦어진 것에 대해 적당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때, 상대가 다른 후보자의 대체자라는 사실은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실제로 2순위 채용자alternative choices는 자신이 해당 직무에서 고려된 1순위가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동료들로부터 덜 수용된다고 느끼며 피드백을 덜 구하고, 해당 조직에 통합되지 못한다고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결국 더 낮은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훌륭한 리더가 나타나 포용의 신호를 보내고 아이디어를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면 고립이 완화된다. 하지만 아무리 포용적인 리더십을 발휘해도 2순위 채용자는 1순위 후보자에 비해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의 정도가 계속해서 낮은 상태로 지속된다고 한다.
본인이 2순위 채용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 인해 유발된 낮은 소속감은, 해당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데 사회적 장벽으로 작용하여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결국, "너보다 더 나은 후보자들이 많았어" 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선택해 주심에 감사하게 만들기보다는 반발심과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연구에서 재밌는 점은, 실제 2순위 채용자가 아니었음에도 2순위 채용자였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조직에서의 사회적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런 인식을 심어 줄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최적의 상대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여기서 최적의 상대를 고르는 조건이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감정적인 확신도 필요하며, 그 외 본인이 정해놓은 여러 가지 기준치에 맞거나 상회하는지 여부 등의 현실적인 고려도 포함된다.
최종 결정에 앞서, 여러 가지 조건을 확인하면서 내가 포기한 부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나, 피부가 흰 배우자를 원했을 수도 있다. 매운 음식을 나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거나, 양말을 벗으면 바로 빨래통에 넣는 사람이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는 타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기준점을 두고 타협을 했을 것이다.
'엽떡은 같이 못 먹지만, 얼굴이 귀여우니까 괜찮아.'
'청소에는 소질이 없지만, 본업은 열심히 하니까 괜찮아.'
시간이 흐르고 결혼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문득 내가 포기했던 부분들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추구했던 이상향과 비교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저 TV 속 연예인은 아무리 바빠도 저녁마다 밥상을 저렇게 잘 차려주는데, 당신도 좀 더 노력하면 어때?"
"OO이네 배우자는 화장실 청소가 취미라는데, 당신도 한 달에 한번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냐?"
배우자가 나의 1순위 채용자였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자.
그리고 배우자에게도 그가 1순위가 아니라는 기분을 굳이 심어주지 말자.
마치 채용 과정에서 후보자가 1순위라는 인식을 받으면 더 높은 소속감과 성과를 내는 것처럼, 결혼 생활에서도 배우자에게 그가 나에게 최선의 선택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관계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다.
일상에서 배우자가 나의 1순위 채용자라는 사실을 리마인드 하기 위한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한다.
배우자의 강점에 주목하고 스스로 리마인드 하는 방식을 활용할 수 있다. 나의 경우, 남편이 세심한 편이라 사소하지만 고마운 일이 많이 발생한다. 두고두고 기억하려고 기록을 해두었다.
(몇 가지 공개합니다.)
240620 출근길에 검정바지를 입는 것을 보더니 미리 신발장에서 검은 운동화를 꺼내 놔 주었습니다.
240713 푸드코트에서 절대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음식 두 개를 다 본인이 받아다 챙겨주었습니다.
240806 귀찮을 텐데 역으로 마중 나와주었습니다. 만두가 먹고 싶었으면서 엽떡에 호응해 줬습니다.
240827 회사 일이 힘들다고 했더니 저녁으로 찜닭을 만들어놓고 영화를 다운받아 세팅해 놓았습니다.
240915 망고주스를 사주려고 온 쇼핑몰을 다 돌아다녀서 결국 사주고 뿌듯해합니다.
이런 고마운 일상 사이에 과연 서운하거나 화나는 일은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그럼에도 축척된 고마운 일상들을 떠올리며 내 남편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지 참, 하며 스스로에게 알려준다. 화나는 일에 대해 그때 저 놈이 그랬었지, 하고 구체적으로 리마인드 해가며 다시 열받는 것보다는, 고마웠던 일을 기록하고 곱씹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긍정적 피드백은 상대가 긍정적 행위를 지속하도록 동기부여 할 수 있다. 긍정적 피드백의 방법은 다양하기 때문에 상대가 좋아하는 형태를 채택하는 것이 좋다. 혹자는 영혼 없는 언어는 힘을 잃는다며 습관적인 칭찬을 지양한다. 그러나 과장을 덧붙인 칭찬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나의 칭찬으로 하여금 상대가 자기 효능감을 높이게 되고, 자신이 이 가정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그 언어의 역할은 종료된다. 결국 긍정적 피드백은 앞으로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마중물의 역할인 것이다.
크고 작은 결정을 할 때 배우자에게 의견을 묻고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내리는 선택들은 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주말에 무엇을 먹을지, 이번 여행에서 어떤 투어를 선택할지에서부터, 더 큰 재정적 결정까지, 각 상황에서 배우자의 의견을 묻고 그의 생각을 존중한다는 의사표시를 해본다. 실제 배우자의 의견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지는 않더라도, 배우자는 자신이 가정 내에서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결국 배우자에게 의사결정을 맡기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이는 그가 나의 1순위 선택자임을 끊임없이 리마인드 하는 실천이자, 우리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소다.
남편은 처음부터 최고의 배우자로 태어났을까?
이 질문의 답을 위해서는 객관적인 사실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나에게 그는 최고의 배우자이며, 그도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렇다는 인식이 그를 점점 더 좋은 배우자로 만들어간다.
단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단점을 상쇄할 만큼의 장점을 가졌다면, 단점을 주목할 겨를이 없다. 내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랑을 표현할수록 상대는 가정에 더 깊은 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더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한 성과를 낼 것이다. 서로가 1순위임을 느끼는 관계에서, 우리는 함께 더 나은 부부 사이를 만들어 간다. 결국, 유니콘 배우자란 처음부터 뿔을 달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뿔을 키워가는 과정의 결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