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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단 Jun 24. 2024

죽은 엉덩이를 살려라

야, 너두 할 수 있어_04

운 좋게도 나의 선조는 내게 긴 팔다리와 가는 뼈의 유전자를 남겨주었다.

그 덕에 평생 ‘날씬하다.’ 라거나 ‘몸매가 좋다.’ 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은 사실이고 동시에 그 때문에 평생 다이어트나 운동으로부터 방치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난 굳이 밝히지 않았다. 아니, 밝혀지지 않길 바랬다. 

십 대부터 적금처럼 쌓여 중년에는 복리이자까지 붙은 복부와 군사분계선 마냥 허벅지와의 경계선만 묵묵히 지키고 있는 밋밋한 둔부를... 

다행히 패션에 대한 열망만 자제하면 얼마든지 위장이 가능한 부분들이었고,
‘너의 뱃살까지 사랑한다’ 라는 무책임한 전남친들의 말을 믿어버렸고, 
애플힙 따위야 몸이 자산인 연예인이나 운동인 외에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이라 여겼기에 어떠한 문제 의식도 갖지 못했다. 


스무 살 즈음, 계단에서 미끄러져 꼬리뼈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다. 

엑스레이 상으로는 꼬리뼈 중 하나가 안쪽으로 밀려들어 간 형태였는데 복원을 하려면 손가락을 항문으로 넣어 뼈를 제자리로 맞춰줘야 한다고 했다. 

그나마 그건 한의에서 제안한 솔루션이었고 양의에서는 아플 때 치료를 받고 시간이 가면서 조금이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 외에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 후로 앉는 자세가 불편하거나 장시간 앉아있게 되면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극심한 허리 통증이 찾아왔고 오래 걷거나 서 있을 때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했다. 

그때부터 책상은 *케아에서 조립식을 살망정 의자만큼은 각종 후기들을 비교해가며 최고급을 플렉스 했고 외출을 하거나 여행을 가도 늘 ‘앉을 자리’ 탐색에, 더 나아가 ‘누울 자리’ 를 찾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100부가 넘는 대장정의 온에어 때면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컴퓨터 앞에 붙어 마감을 해야했고, 허리는 그야말로 '아작' 이 나서 병원 대기실에서 진료실까지를 네 발로 기어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밀검사를 해도 경도의 측만증과 수술이나 시술까지는 필요 없는 노화에 의한 디스크 정도의 진단 밖에 나오지 않으니 더욱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게 반평생을 허리통증에 시달리는 사이, 정형외과 도수치료부터 한의원 추나요법 하다못해 경락과 스포츠마사지까지 안 해본 치료 없이 다 해봤고 운동 역시 수영, 요가, 필라테스, 기체조와 킥복싱까지 허리에 좋다는 건 무수히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무엇을 하던 그때 뿐... 

‘디스크 걸려 죽은 귀신이 붙은 거처럼’ 허리통증은 평생 내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 PT샵을 방문하면 운동 목적을 묻는데 그에 대한 내 대답도 1번이 허리통증이었다.

운동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기에 기대가 컸다. 

하기만 한다면 무조건 탄탄한 기립근이 생길 거고, 그로 인해 척추는 평온히 쉴 수 있을 거고, 그로 인해 통증 따위는 날려버릴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초반에는 딱히 좋아지는 걸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중량 운동을 처음 하다 보니 무리하면 허리가 더 아프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이런 실망감과 불편함을 들은 트레이너가 난데없이 내 엉덩이를 지적질했다.

“회원님 옆 모습을 보세요. 엉덩이가 일자로 떨어지죠?”

그렇단다. 내 밋밋한 엉덩이가 범인이었단다. 

엉덩이 근육은 전체적으로 몸을 지탱해주고 허리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데 난 그게 없으니 허리 혼자 열일하다 고장이 나 버린 셈이다. 

난생 처음 듣는 이 소리에 난 적지 않은 충격과 동시에, 완벽하게 설득이 되어 버렸다.

"잡았다. 이놈!"


그 후, 난 엉덩이만 패기로 했다. 

세수할 때나 설거지할 때 힙힌지는 기본, 드라마나 영상을 볼 때 스쿼트는 필수, 엘리베이터나 버스를 기다릴 때는 엉덩이 조였다 풀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브짓지와 크렘쉘 운동 등 일상에서도 틈만 나면 영덩이를 괴롭혔고 센터에서는 '원레그 데드리프트, 힙쓰러스트, 케틀벨 스윙' 등의 둔부 운동에 집중했다. 

그랬더니 찹쌀떡 같던 내 엉덩이가 가래떡 정도로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촉진’ 가능한 나만의 느낌일 뿐, 시각적으로까지 드러나진 않았다.

거기다 '체지방과 근육의 제로썸 게임' 때문에 아무리 운동을 해도 질 (근육 밀도)은 올라갈 수 있으나 양 (사이즈) 는 키우기 어려웠다. 

그렇게 엉덩이에 집착하는 사이 허리통증은 어느새 사라졌고 이제 목표는 더 이상 ‘타도 요통!’ 이 아니었다.

SNS에 엉덩이 쭉 빼고 ‘오운완’ 피드 올리고 싶었고, 청바지로 감출 수 없는 애플힙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묵묵부답...

'좁은 골반과 마른 체형' 이라는 유전자를 이길 수는 없는 거라며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즈음, 거짓말처럼 엉덩이가 조금씩 화를 내기 시작했다.

절벽 같던 각도에서 매달려 살아남을 만큼의 언덕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미세하지만 천천히 언덕의 경사가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극적인 기적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주인공이 살아 돌아오듯, 죽은 엉덩이가 살아난 것이다. 


결국 나는 엉덩이 두 짝을 훤히 내놓고 바디프로필을 찍었고 운동이 주는 정직한 피드백을 다시금 실감했으며 도전 정신이 한 단계 상승했고 성취감의 끝판왕을 맛 보았다. 

물론 요즘도 ‘작지만 소중한 내 엉덩이’ 꺼질세라 여전히 스쿼트와 힙힌지에 집착하며 그 불씨를 이어가고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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