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신호 May 07. 2024

국토의 숨결을 읽으며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권 서문에 나와 있는 문장이다. 하루에도 수십 권의 신간이 쏟아지는 오늘날이다. 그 중에는 애써 구입해 읽기에 시간이 아까운 책들도 있다. 물론 현찰을 지급하더라도 내 서재에 입고를 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책도 있다. 내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3권은 후자이며 애장 도서 1호다.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을 다닐 무렵. 미래는 미세먼지에 쌓인 희미했. 짧은 회사 생활을 퇴사하고 친척 어른 밑에서 가스업을 했지만 사회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다시 캠퍼스로 돌아갔고 교육대학원에 입학했. 나의 서른 즈음 불안과의 동거였다.    

 

 답답한 날들이 흐리게 지나고 있었다. 어느 인지 가을인지 아무튼..., 햇살 고운 날이었다. 하루는 점심 식사  후 어슬렁대며 대학 구내 서점을 찾았는데, 그곳 매대에는 눈을 끄는 책 한 권이 있었. 책의 회색빛 표지에는 감은사지 삼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저자는 유홍준, 출판사는 창작과 비평사였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의 조우였.      


 그날 이후 지금껏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새 시리즈가 나오 성실하게 주문했고 탐욕스럽게 읽었다. 그러는 동안 저자 유홍준은 남도의 대지, 안동의 유림, 공주와 부여의 고즈넉함, 천년의 고도 경주와 비경의 제주도 그리고 궁궐 도시 서울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때로는 분단을 넘어 평양과 금강산까지. 심지어 일본의 정원으로, 실크로드의 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새 책 냄새를 맡으면 열병을 앓곤 했다. 애써 잠재웠던 역마살이 기지개를 . 그리곤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 준비하자고. 나가 봐야지 ” 그 충동질을 이길 수 없었다. 자가용도 없이 변변한 용돈으로 집을 나섰다. 버스와 기차, 때로는 발품으로 답사의 현장을 찾았다. 봄의 산사. 여름의 산과 강으로. 가을에는 궁궐과 서원이었고, 겨울이면 박물관과 폐사지로 향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광야를 헤매는 히브리족을 인도하던 불기둥이었다.      


  순천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이어진 산길이었다. 조계산 마루를 넘어설 때쯤 혼자 걷는 당찬 낭자를 보았. ‘여자 혼자 이런 산속을... 용감하구먼이라고 탄복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걷다가, 산마루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 그 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먼저했다. 그녀도 내게 답례를 했고 말을 걸어왔다. “전라도 분이세요?”라고.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송광사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숙명여대를 다닌다는 처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소개된 경로를 따라 일주일 예정으로 집을 나섰다고 했다. 낯선 전라도 땅, 해남, 강진, 담양, 영암에 이어 답사의 마무리로 선암사와 송광사까지 들리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말끝에 전라도는 햇볕도 참 포근해요라며 전라도가 좋아졌단다. 전라도의 햇볕이라... 별스런 호남 찬탄이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일이 년 간격으로 신간이 나왔다. 3권의 부제는 말하지 않은 것들과의 대화였다. 역시나 역마살과 손잡고 길을 나섰다. 장소는 금강. 토요일 이른 아침, 육아에 지친 아내는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이른 새벽 집에 나섰다. 논산과 금강 그리고 공산성을 둘러본 후 오후 3시쯤 집에 들어갔다. 아내는 부스스한 얼굴로 무등산에 다녀왔냐고 물었다. 충남 공주를 다녀왔다고 했더니 어이없어 했다.     


 작가 유홍준을 두고 방송계의 3대 구라라고 한다. (나머지 두 구라는 이어령 교수와 도올 선생이라나) 그는 유신 철폐 시위 혐의로 힘든 70년대를 보냈다. 그러니 서울대를 졸업한들 정상적인 취직이란 난망한 일이었다. 결국 지인들이 창간한 <사회평론>에서 우리 문화재를 소개하는 취재를 3회 예정으로 했었다. 그 작업이 오늘날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을 못자리가 되었다. 출판사도 별 기대 없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출판했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초대박을 터트릴 줄을.     

 얼마 전 유홍준은 그간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를 마무리하는 뜻으로 국토박물관순례 1,2권을 냈다. 앞으로 3, 4권까지 나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책이 이제는 그만 팔렸으면 한다는 말을 했다. 그 이유가 자신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뛰어넘는 보다 훌륭한 서적을 기다린다는 뜻이니 후학들의 분발을 바라는 뜻이.      


 아는 것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혀 같지 않으리니와 같은 책 속의 문장은 이미 널리 회자된 지 오래다. 어찌 보면 1990년대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궁합이 잘 맞은 시절이었다. 마이카 시대가 도래했고, 레저라는 신용어가 등장했으며, 영화 <서편제> 등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던 때였다.     


 내게는 다섯 권의 바인더 앨범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서 답사했던 지역의 문화재와 풍광을 담았던 답사보고서다. 지금도 그 앨범에 있는 문화재 사진을 보때면 당시의 풍광이 눈에 서하다. 변산의 낙조와 산사의 저녁 예불, 궁궐에서 느꼈던 왕조의 비운, 폐사지의 고즈넉함, 장엄한 고분들.     

 책 한 권으로 행복했던 나의 화양연화여. 머잖아 퇴직하면 다시 한번 답사기를 가방을 넣고 산천을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이 땅을 누비는 것도 복된 인생이 아니겠는가.


 우리 시대의 신 택리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감사한다. 지난 삼십 년을 아름답게 꾸며줘서. 또한 영원한 학생임을 잊지 않게 해 줘서.

작가의 이전글 너른 바다에 풍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