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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May 29. 2024

아무튼, 용맹정진

펭귄연인 - 정끝별

팔이 없어 껴안을 수 없어

다리가 짧아 도망갈 수도 없어


배도 입술도 너무 불러

너에게 깃들 수도 없어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껴안고 서 있는

여름 펭귄 한 쌍  

        

밀어내며 끌어안은 채

오랜 세월 그렇게

    

서로를 녹이며

서로가 녹아내리며     

     


 ‘사이가 좋다’는 평화로운 말이다. 둘 사이에 훈훈한 기운이 흐르는 경우를 뜻한. 나와 너, 그대와 그녀 사이에 놓인 적당한 거리. 그틈으로 훈훈한 바람이 스치고 따스한 온기를 적당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 그만큼의 거리, 둘만이 느낄 수 있는 평화로운 간격이 ‘좋은 사이’다.   

  

 사이가 좋은 남녀를 가리켜 연인이라 한다. 나와 연결될 수 있는 또다른 우주를 발견한 기쁨으로 열정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서로가 좋아죽겠다는 감정이 달콤한 탓에 초콜릿과 사탕을 주고받는 밸런타인 데이나 화이트데이를탄생시켰다.   


  5월은 기념일이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연이어 다가온다. 물론 스승의 날은 최근 들어 유명무실하니 제외키로 하자. 대신 예상하지 못했던 기념일하나가 등장했다. 2007년부터 지정된 기념일이라 하는데  생소하. 그날은 5월 21일. 부부의 날이다. 작년 처음 알았을 때부터 심드렁했. 챙겨야 할 하루가 더 생긴 것이니 말이다. 

    

이래저래 5월은 사람도리에 바쁘. 이런 기념일 민감도에 남녀의 차이가 있으니,  남성이 여성에 비해 '아주아주 많이많이' 둔하다는  사실. 내 경우도 결혼기념일을 자주 깜박하는 까닭에, 12월이면 잔소리로 포장된 아내의 원망을 듣곤 한다.     


 올해로 결혼한 지 삼십 년이다. 서로 다른 DNA 환경에서 자라난 남녀가 한 가정을 이루겠다며 화촉을 밝혔으니 룰룰랄랄 노래하듯 순탄할 수는 없다. 사소하게는 치약 짜기에서부터 말투, 경제관념까지 조율사가 수시로 출장 나올 만큼 나와 아내의 화음은 엉망이었다. 이제는 각방이 자연스러운 묵은 부부가 되었으니, 우스갯소리로 배반은 하지 말자를 외치는 나름의 전우애는 있다.


 <펭귄연인>은 정끝별 시인 작품이다. 시인은 우리말 외자인 을 이름으로 하기에 쉽게 각인된다. 정끝별은 시집이 아닌 행 산문집 여운에서 처음 알게 된 시인이. 그녀의  여운은 선운사와 같은 여행지와 그곳에 얽힌 시를 소개하는 기행 에세이인데 문체가 수려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 무명에 획을 긋는 /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로 끝나는 정끝별의 <가지가 담을 넘을 때>2024년도 수능 언어영역에 문제로 출제되었. 평론가들은 시인의 미덕으로 탁월한 리듬 감각을 꼽는다. 시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펭귄연인이 들어있는 은는이가는 눈에 띄는 시집이.

      

 펭귄연인은 안타까운 남여. 팔, 다리가 짧고, 배만 불룩하니 나왔으니 껴안을 재간이 없다. 말 그대로 엉거주춤이다. 오래된 연인들은 공감하리라. 하지만 마지막 두행 묵은 사랑, 흔한 말로  정의 실제를 이렇게 노래한. “… 서로를 녹이며 서로가 녹아내리며”라고   


 천주교 수도자들이나 절집 스님들은 독거(獨居) 생활을 서약한다. 신앙과 본능을 맞교환한 셈이니 고단한 수행자의 삶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르리라. 결혼이야말로 봉쇄 수도원만큼이나 치열한 수련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갈라선 연인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혹은 같은 공간만 공유할 뿐, 외로운 부부들 천지다.


 언젠가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아내를 가리켜 나의 로또라고 소개했다. 아내 얼굴은 환해졌고 주위 사람들은 ~”하면서 나의 노골적인 아첨에 감탄했다. 방심은 금물, “정말 맞지 않아요라는 이어진 말을 듣기까지는. 아무튼 아내와 살아온 세월이 벌써 사십 년이라니, 용케 잘 견뎌낸 이다.   

   

 밤낮 설렌다는 신혼의 연인보다 생활과 함께 데면데면해진 연인의 사랑은 묵직하다. 신뢰와 사랑이 정()으로 발효해서 깊은 맛을 내는 까닭이다. 아내와의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 알 수 없다. 부디 사십, 오십 주년이 될 때까지 펭귄 연인처럼 바라보고 지켜주면서 남겨진 인연의 실타래를 술술 풀어볼 일이다.

     

  아내는 부부의 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다. 물론 그녀의 복잡한 계산속은 모르겠만. 머잖아 아내의 생일이 다가온다. 미리미리 가성비와 생색내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이번에시집으로 까? 아무래도 경칠 일같. 이러니 펭귄 남편은 뒤뚱거릴 수밖에. 가정의 평화를 위한 나의 용맹정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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