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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의 착한 이야기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by 박신호

새해 들어 만난 첫 책이다. 며칠째 오락가락하는 눈발 덕분에 모처럼 진득하니 책의 향연을 누렸다. 덤으로 고구마를 삼킨 듯 답답했던 세상의 소음에서도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민족의 여정을 부정하던 언어도단의 무리를 떠올려본다. 건국과 광복, 자유와 헌법을 타락한 언어로 만드는 패악질에 말을 잃는 겨울이다.


바른말과 글이 아쉬운 시대일수록 독서는 사회를 지키는 백신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인표의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는 착하고 건강한 소설이었다. 작가는 유명 연예인이다. 그런 까닭에 작품을 대하는 시선이 미덥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손가락이 아닌 달을 응시해야 하거늘 말처럼 쉽지 않다. 불현듯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정치인 처칠과 팝스타 밥딜런이 떠오른다. 글이란 전문 작가의 소유물이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지난 세모(歲暮) 때. 감명 깊게 시청했던 다큐 10부작 <바울로부터>의 내레이터가 차인표였다. 한때 ‘차림표’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그는 재벌 2세와 거지 왕초, 분노의 양치질 등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제 그는 착한 사람, 선한 영향력을 떠올리게 하는 중견 연기자로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세 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한 작가라니. 그의 인생 도전이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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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이하 언. 우. 별)의 미덕은 잘 읽힘에 있다. 요즘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린다는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으려면 고칼로리의 소모를 각오해야 한다. 반면『언. 우. 별』은 난독의 체증을 확 내려 주듯 술술 읽히는 즐거움을 독자에게 선사해 준다. 용서와 연대와 같은 묵직한 가치를 다루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품은 작가의 착한 시선으로 빚어낸 어휘의 자태가 아름답다. ‘연분홍 구름국화꽃, 노란 애기똥풀, 새하얀 박새꽃, 진분홍 털개꽃, 자줏빛 두메자운꽃’ 등 우리말을 펼쳐낸 작가의 노고가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영상 같은 생생한 묘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호랑이 마을에 들어서는 황포수와 용이의 극적인 등장은 롱테크 영상을 떠올리게 한다.


『언. 우. 별』에는 역사적 서사를 바탕으로 설화적인 요소가 녹아있다. 우리 겨레를 상징하는 호랑이는 등장인물들과 깊게 호흡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영물이다. 또한 사건의 전환 때마다 나타나는 새끼제비는 서술자의 분신이자. 작가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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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평론가는 작품이 ‘당신이 그 시대를 살아갔다면 어떻겠냐?’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고 말했다. 19살 순이가 필리핀의 쑤니 할머니로 변모했던 70년 세월을 헤아려본다. 커피를 몹시 사랑했다는 망국의 이왕(李王)과 그 일가는 무능의 대가로 받은 재물로 호화롭게 살았지만, 민초들은 만주, 중앙아시아, 사할린, 하와이, 쿠바 등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국가의 목적은 국민 안위에 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그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홍범도 장군을 빨갱이로 정죄하려는 이 시대는 쑤니 할머니가 견뎌야 했던 세월에게 뭐라 답해야 할까.


“우리가 가는 곳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프고 힘든 곳이라면 우리를 빨리 엄마별로 데려다주세요. 엄마와 함께 평화로운 곳에서 살 수 있도록요. 엄마.... 저, 지금 무서워요”(151쪽)


몇 해 전, 영화 <귀향>에서 받았던 충격은 잊을 수 없다. 망국을 맞이하면 민족의 가장 나약한 고리에서부터 끊어지는 법이다. 작가는 식민지의 지사(志士)보다는 미약한 여인들에게 주목한다. 그 기점은 1997년 잠시 모국을 찾았던 훈할머니부터라고 고백하고 있다. 16세 나이에 강제 징용되어 지금껏 캄보디아에 살고 있다는 훈할머니의 슬픈 운명이 호랑이 마을의 19살 순이와 먼 훗날 쑤니 할머니로 치환되어 글 속에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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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백호를 용서해 주면, 엄마별을 볼 수 있게 될 것 같아... 용서는 백호가 용서를 빌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별 때문에 하는 거야, 엄마 별이 너무 보고 싶으니까. 엄마가 너무 소중하니까”(195쪽)


작품은 용서를 이야기한다. 아내를 물고 사라진 백호를 찾아 백두산 기슭까지 찾아온 황포수와 아들 용이의 삶은 복수 자체이다. 그런 까닭에 엄마별을 보기 위해서 용서하라는 순이의 말에 용이는 답하지 못한다. 백호란 일제의 다른 말이니 ‘용서’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 없는 용서란 무의미하다. 문득 위안부 문제를 배상금으로 해결하면 안 된다며 일갈했던 박경리 선생님이 떠오른다. 선생은 배상금이 화대(花貸)가 될 수 없다며 일본의 진정한 사죄는 그들의 역사 교과서에다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하는 것이라 했다.


작품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일본 장교 가즈오 설정이다. 작가는 가즈오를 통하여 국적과 이념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 심성을 강조한다. 삽화처럼 제시된 가즈오의 편지를 통하여 독자는 인물 내면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새삼 작가의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가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는 구성 방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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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을사년이다. 내가 태어났던 때가 을사년이었으니 육십 년 만에 다시 상봉한 갑자(甲子)라 할 수 있다. 이른바 환갑인 셈이다. 하여 인생 하산길 초입에서 따스한 시선을 지니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작가처럼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착한 글이 나올 것만 같다.


같은 별을 바라보는 세상을 꿈꿔본다. 순이, 용이. 가즈오와 더불어 앉아서 착한 별을 바라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한다면 언젠가 착한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월의 낮은 하늘 아래서, 야광봉과 성조기가 사라진 봄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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