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다양성을 존중하는 교육
최근에 학교에서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밥을 먹고 봉지를 주섬주섬 꺼낸다. 어떤 대안학교 선생님은 예전엔 점심시간에 나가 놀기 바빴는데, 요즘은 "약 먹는 시간"이 필요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우울증, 조울증, ADHD 아이들이 낯설지 않은 진단명을 갖고 있다.
수업 시간에 갑작스레 자해 소동이 벌이지기도 하고, 손목을 칭칭 감고 오는 경우는 허다하다. 강우와 대화를 나누다 자살 충동을 발견하고선, 그의 부모와 세심하게 관찰하며 지켜본 적도 있다. 진희는 학교에서도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해서 부모님과 계속 연락을 하며 교사들은 그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기도 한다. 아이가 직접 이 상황을 개방하기 전까지 우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를 살핀다. 영민하고, 예의 바르고, 재능이 많은 아이들이 어디서 이토록 상처받았을까 생각하면 아프다. 자녀의 어려움이 당신 탓인 것 같아 어깨가 축 처진 부모님을 보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아이의 문제도, 부모의 탓도 아니다. 이런 현상을 그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너무 일찍 시스템에 편입된다. 세 살이면 어린이집에 가고, 그곳에서 ‘규칙’을 배운다. 자유롭게 바람을 쐬고, 마음껏 투정 부리고, 실컷 뛰노는 시간은 줄어든다. 대신 규칙을 잘 지키는 ‘착한 아이’로 자라난다.
부모는 바쁘고, 아이와 살을 맞대고 교감할 시간은 적다. 스마트폰이 유일한 부모와의 연결고리가 된 아이들이다. 사랑과 자유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아이는 불안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향해 돌린다.
대안학교 교사인 나는 교복 입은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도망쳐 나와 상담을 오는 경우를 본다. “종일 책상에 앉아 멍하게 앉아 있는 게 괴로워요”라는 호소를 듣는다. “이렇게 있다가는 제가 이상해질 것 같아요. 엄마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시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부모님은 이런 상황을 알지만 “참고 견디다 보면 나아진다”는 말 이외의 격려를 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이는 생각할 시간, 친구를 사귈 시간, 직접 오감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를 억누른 채 살아가는 아이들은 더 쉽게 무너진다.
푸코의 지적처럼, 근대 사회는 규범을 벗어난 사람을 ‘정신병자’로 분류해 통제해 왔다. ADHD나 우울증이라는 이름도 어쩌면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규범일지 모른다. 책상에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를 환자로 규정하고, 약을 먹인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들판을 뛰놀며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을 에너지 아닌가.
산업사회는 효율과 규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왔다. 모두가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고, 같은 속도로 같은 결과를 내야만 인정받았다. 그 과정에서 조금만 다른 리듬을 가진 아이들은 ‘문제아’가 되었다. 표준화된 대량생산 체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병명과 낙인을 떠안아야 했다. 그러나 미래 사회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공장식 체제가 아니라, 창의성과 개별성을 자산으로 삼는 4차 산업혁명의 시스템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우울하거나 불안한 아이들을 가까이에서 많이 만났다. 한 아이는 평생 우울증 약을 먹는 일을 단절하고 싶어 약을 끊었다. 후유증으로 다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는 그의 집 앞에서 그를 불러 점심을 먹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등대처럼 우리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메시지로 전할 뿐. 다행히 그는 밖으로 나왔다. 담임과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는 졸업 작품을 내었다. 그의 작품 앞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깊어진 그의 시선과 만났다. 또 다른 아이는 손목을 가리고 오는 날이 많았다. 몇 년이 지나 상처 대신 웹툰 속 사회에 대한 시선 깊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또 다른 아이는 대안학교로 옮기며 “저는 이제 우울증 약을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라며 철학적 사유에 골몰했다. 자신의 자화상을 조각으로 만들어 전시를 했다.
이들의 아픔이 예술과 사유로 바뀌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아이들은 상처 속에서 더 깊어졌고,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바란다. 아이들이 반드시 아픔을 겪어야만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기를. 그들의 뇌가 가진 고유한 방식, 즉 신경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만은 아니다.
해외에서는 신경 다양성 운동(Neurodiversity movement)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는 ‘Neurodiversity Hiring Program’을 운영하며, 자폐·ADHD 등 신경다양한 지원자들을 위해 맞춤형 채용 과정과 직장 적응 지원을 제공한다. “다른 사고방식이 팀에 강점을 준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신경다양성을 장기 전략으로 삼고 있다. 영국 정부는 2025년까지 초등학교 1,200곳에 PINS (Partnerships for Inclusion of Neurodiversity in Schools) 프로그램을 적용해, 신경다양한 학생들이 차별 없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를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기업과 교육 현장에서 신경다양성을 존중하는 흐름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뚜렷하게 확산되고 있다.
신경다양성 관점은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사회가 아이에게 맞추는 것'으로 시선을 전환한다. 이는 아이들의 독특한 사고방식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뛰어난 집중력으로 복잡한 패턴을 인식하는 아이는 미래의 데이터 분석가나 과학자가 될 수 있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로 산만해 보였던 아이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꾸는 기업가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우울과 ADHD,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들은 병든 존재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해석하는 ‘다른 뇌’를 가진 존재다. 그들이 지금은 환자로 불리지만, 사실은 다가올 미래를 앞서 살아가고 있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산업사회의 규율에 어긋나는 특성이, 창의성과 다양성을 필요로 하는 미래 사회에서는 강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병원 치료와 병행하며 아이들 스스로가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첫째, 아이들이 자신의 진심과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아이들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길잡이 교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주고, 처방을 제시하기보다 힘이 생길 때까지 같이 해주는 교사 또는 친구가 함께 그 과정을 지켜보았고 힘이 되었다. 둘째,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말을 꺼내는 분위기이다. 또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유연한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아이들을 그냥 두면 이상한 짓 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 또한 스스로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고 싶은지도 안다. 단지,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어서 무엇이 있는지 모를 뿐. 셋째, 시간을 주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시간, 실패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잦은 실패는 아이들을 위축시키기 때문에 강점을 찾고 이를 발전시켜 성취감을 줄 수 있는 일들을 작게 쪼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아이들을 환자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신경다양성에 대한 교육과 정보를 공유하고, 사회 회구성원 전체가 '다름'을 '틀림'이 아닌 '다양성'으로 존중하는 문화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이미 미래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환자가 아닌 다양성의 주체로 존중해야 한다. 그 고유한 감수성과 독창적인 시선은 예술가의 작품으로, 혁신가의 발상으로 세상을 새롭게 열어젖힐 수 있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틀을 넓히는 일, 그것이 우리 어른들에게 주어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