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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Feb 20. 2024

걷자


5일 만에 첫 외출을 감행했다. 일찍 뜨고 지는 겨울 해가 넘어간지 이미 오래인 저녁, 주섬주섬 파자마 바지 대신 통이 넓은 청바지로 갈아입고, 양말을 신고, 롱패딩을 걸친 뒤 분신 같은 미니 백을 메는 것을 끝으로 외출 준비를 마쳤다. 


플라스틱, 금속, 유리병, 비닐까지 소재별로 따로 담은 재활용 쓰레기와 꽉 채운 10L 종량제 봉투 2개, 음식물 쓰레기를 양손에 주렁주렁 매달고 집을 나섰다. 양팔이 아파오고 잔뜩 힘을 준 손가락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아 손이 뻣뻣하게 차가워질 때 즈음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동 현관 문밖을 나서자마자 밀려드는 차가운 겨울밤 공기와 함께 문득 이 공간이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4일하고도 11시간 남짓이지만 너무 오래 땅을 밟지 않았고, 바깥세상과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 5년 넘게 살고 있는 집 앞이 유난스럽게도 새로웠다. 아무래도 처음 계획한 대로 도서관과 마트, 떡볶이집까지 모두 들러 나름의 대장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야겠다고, 최대한 많이 걸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분명히 오늘은 춥지 않아 미세먼지가 더 많이 낀 날씨라고 들었는데, 두 뺨에 닿는 바람은 거짓말처럼 너무 차가웠다. ‘역시 나는 여름이 더 좋아.’ 봄과 가을이 거의 사라진 2계절의 나라에서 꼭 하나의 계절을 고르라면 나는 역시 여름이다. 그리고 나에게 여름은 언제나 초등학생 시절을 보낸 할머니 댁 풍경으로 이어진다. 그래, 그리고 그땐 나 참 많이 걸었었지. 


할머니 댁은 산 밑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였고, 학교는 바닷가에 있었다. 기억하기로 그 당시 버스비는 80원가량. 용돈을 받으면 ‘회수권’이라 부르던 버스 차표를 묶음으로 사곤 했지만 나는 회수권을 사고도 그냥 걸어갈 때가 더 많았다. 


길가에 장이 서기에도 너무 이른 아침, 아파트 정문을 나서 조용한 인도 위를 걸었다.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오른쪽 길 건너에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이 있는 하얀 2층 건물이 보인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교육열 강한 할머니는 이제 공부에 집중할 때라며 피아노 학원은 그만두게 하셨다. 피아노 치는 건 즐거웠지만 ‘나는 공부를 잘해야만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는 일이 마땅히 내가 맞이해야 하는 당연한 일로만 여겨졌다. 


피아노 학원 건물 1층에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이미라 작가님의 만화책 <은비가 내리는 나라>를 샀던 서점이 있었다. 설날에 받은 세뱃돈을 들고 동생과 함께 처음으로 만화책이라는 것을 접했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주인공 이슬비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과 도깨비 대마왕님의 아름다운 용모와 긴 머리카락이 꽤나 인상 깊었다. 그날 이후로 매년 새학기가 되면 항상 무지 연습장을 사서 만화책 그림을 따라 그리거나 눈에 별이 박히고 코가 숫자 3처럼 생긴 공주님 그림 같은 것을 그리며 놀았더랬다.



주변 건물이 모두 적갈색 벽돌로 지어져 갈색 빛깔로 기억에 남아 있는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면 몇 백 년 나이를 먹었다는 보호수가 두둥하고 나타난다. 수종이 느티나무였던가. 그 나무는 언제 보아도 참 인상 깊었는데, 그 둘레는 나 같은 어린아이 여러 명이 둘러 안아도 다 감쌀 수 없을 만큼 크고 두꺼웠다. 한 번도 나무를 타본 적 없는 나였지만 어쩐지 그 나무만큼은 내가 타고 올라가도 아파하거나 다치지 않고 든든하게 나를 다 받아줄 것만 같아 볼 때마다 마음이 든든하기만 했다.


보호수에서 다시 한참을 걸어 내려가면 참새 방앗간 들르듯 들렀던, 2층인지 3층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 나지막한 도서관이 나온다. 집과 작은 상가만 드문드문 있는 그 동네에서 도서관은 나에게 가장 재미있는 장소였다. 밖에서 같이 놀 친구도 많지 않던 나에게는 매일 도서관 대출 카드 목록을 2줄씩 채우고, 가끔 열리는 독서 퀴즈 대회에 나가 학용품을 받아오는 일이 가장 큰 낙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넉넉히 들어오던 서가에서 나름의 고심을 거쳐 빌려올 책을 고르던 시간과 어쩐지 갖고 싶지만 갖지 못했던 백과사전이 놓여 있던 어두운 서가에서 마치 멋진 어린이가 된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며 백과사전의 어느 한 부분을 슬쩍 읽고 오던 그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산에서 시작해 바다에서 끝나는 등굣길, 자음 ㄴ과도 닮아있는 그 길의 꼭짓점에는 왕복 4차선 도로가 등장하는 삼거리가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은 도로와 달리는 자동차, 옹벽과 나무밖에 없는 그 길을 걷는 일은 참으로 지루해서, 중창단에서 배운 동요를 메들리로 불러야 겨우 걸을 만했다. 한참을 노래를 부르며 걷다가, 언제나 반에서 제일 키가 작았던 내게 그렇게 커 보일 수 없던 거대한 육교를 지나면 드디어 학교다. 밤이 되면 사람 손으로 변한다는 다섯 갈래로 잎이 갈라진 나무를 지나, 사실은 매일 책장이 넘어가고 있다는 책 읽는 소녀 동상을 지나면 정문. 나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나고는 했다.


거실 식탁에서 일을 하고, 온라인으로 장을 보며 24시간 동안 집안에만 있어도 생활이 가능한 재택근무자가 된 나. 지난 한 주 동안 마치 고여서 썩기 시작한 물처럼 손대기 조심스럽게 우울하고 위태로웠던 것은 너무 집안에만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고민거리와 걷는 일 사이에는 이성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만 문득 떠오른 초등학생 시절의 어린 내가 만약 지금 나에게 와준다면, 그때처럼 재미있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한 집 밖으로 갈래갈래 놓인 이 길을 그냥 쭉 걸어가다 보면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던 바다가 보이는 학교처럼 내가 가고자 하는 그 어딘가에 다다르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하루에 한 번은 밖으로 나와 걸어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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