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플마 Jul 17. 2023

내 인생 최고 퍼즐과의 조우

회고록: PDP 3 (PDP 가스 압력 측정하기)

이 글은 첫 직장이었던 S사 PDP 사업팀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서 이전 글들(회고록 1: 손질 잘 된 프로그램, 회고록 2: 그 많던 퇴사 이유는 어디로 갔을까?)에 이어지는 글이다. 앞의 두 글에서는 PDP 사업팀을 괴롭히던 큰 난제를 해결한 성과들에 대해서 소개했다. 본 글에서는 이전의 난제들에 비해서 중요도는 떨어지지만 가장 기쁨을 느꼈던 어떤 문제 하나의 해결 과정을 소개한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문제였다.


플라즈마 물리학의 동문 선배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와! 이것을 이렇게 풀어내다니, 천재구만!"


난 천재가 아니었기에 '천재'라는 말이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풀어냈다라는 '사실'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흐뭇하게 만든다.

PDP(Plasma Display Panel) 개발 과정에서 제기됐던 문제인데 마치 고급 퍼즐과 같은 문제였다.

통상적으로 퍼즐은 이미 답이 존재한다. 따라서 끈기만 있으면 답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접했던 이 문제는 답이 있는 퍼즐이 아니었다.

'혹시 답이 있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제기된 문제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결론은 '답은 없다'로 귀결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그냥 포기하는 것이 맞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난 이 문제의 답을 찾아냈다.




PDP 개발 초기 였다.

PDP 업체들은 대형 평판 TV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 저마다의 독자 기술 확보에 애를 쓰고 있었다.

특허를 통한 기술 방어도 중요했고 상대방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 회피 기술 개발도 중요했다.

따라서 타 업체의 PDP 기술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 또한 중요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들은 공개된 특허와 논문들을 통하여 거의 파악이 되고 있었기에,

기술 파악을 위하여 타 업체의 실제 제품을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런 화두를 던졌다.

"PDP를 완벽하게 리버스 엔지니어링 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하면 어떤 PDP를 해체 분석하여 거기에 사용된 기술들을 다 알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체적인 답으로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세세한 기술 내용들은 차치하고라도 명확한 이유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PDP의 가스 압력은 절대로 측정할 수 없다'

였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문제를 다음과 같이 바꿔보자.

PDP를 유리로 된 가스등이라고 생각하자.
이 가스등 품질의 핵심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가스의 성분과 가스의 압력이다.

어떤 정체 모를 가스등이 하나 입수되었는데 성능이 아주 좋다.
그래서 이 가스등에 들어 있는 가스의 성분과 압력을 알아내고자 한다.
가스의 성분을 알아내기는 쉽다.
가스등을 깨뜨려 빠져나오는 가스를 채집하여 성분 분석을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압력이다.
밀폐된 가스등 유리관 내로 압력계를 집어넣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압력계 연결을 위해서 가스등을 깨뜨린다면 그 순간 압력이 바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자, 이 가스등의 가스 압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문제를 다시 정리해 보자.

     "밀폐된 유리관 안에 들어 있는 가스의 압력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의 답을 찾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대부분 금방 포기했다. 가스등을 깨뜨리면 압력이 바뀌므로 안되고, 깨뜨리지 않으면 압력계를 연결할 방법이 없어 직접적인 측정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레이저를 이용하는 간접적인 방법이 없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레이저로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의 질문으로 끝이 나고 있었다.


나도 직접적인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꺼야.'

난 문제를 계속 붙들고 늘어졌다.


우선 가스 분석실에서 사용하는 통상적인 가스 시료 채집 장치를 상기해 보았다. 가스 시료 채집을 위한 이 장치는 다음과 같이 작동된다. 커다란 진공 챔버 내에 가스등을 넣고 이 가스등에 작은 구멍을 낸다. (구멍을 내는 방법은 논외의 얘기이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이렇게 가스등에 구멍이 뚫리가스등에서 빠져나온 가스가 챔버를 채운다. 챔버는 처음에 진공 상태였기에 챔버 내에는 가스등의 가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 챔버로부터 가스 시료를 채집한 후 분석실로 보내어 성분을 알아낼 수 있다.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은 압력 측정이다. 이 챔버에는 압력계가 달려 있다. 따라서 가스등의 가스가 챔버를 채운 상태에서의 압력은 측정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렇다. 방법이 있다. '보일의 법칙'을 이용하면 된다. 중학교 1학년 때 배우는 그 법칙 말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보일의 법칙 알아?"
   "뭐야? 날 무시하는 거야? 보일의 법칙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 보일 샤 뭐시기도 알아.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보일의 법칙은 중학교 때 배우는 거잖아. 그렇게 오래된 것도 기억하는지가 궁금했어.
    근데 보일-샤를의 법칙도 안다고 하니 대단하네. 그건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내가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이유는, 이 글을 쓸까 말까 고민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모르는 보일의 법칙을 계속 언급하는 글을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난 내 글의 궁극적인 독자는 아내라고 생각하며 글을 쓴다.
이 글도 '우리집 추억담' 문집에 들어갈 예정이고, 언젠가는 아내가 읽게 될 글이다.

아내의 대답으로부터 난 또 다른 용기까지 얻었다.
이 글을 브런치에 올려도 되겠다는 용기를.
일반 독자들도 보일의 법칙을 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내는 이미 지나간 일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다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오랫동안 함께 살면서 알게 된 것은, 아내에게는 중고등 학창 시절에 배웠던 것들도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절에 배웠던 것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런 아내인데 다행히 보일의 법칙은 기억하고 있다.
아내가 보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아마도 다른 많은 사람들도 보일의 법칙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 글의 맥락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이 글에서 설명하는 수식 전개 과정을 다 이해해 가며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맥락만 보면 됩니다.)


보일의 법칙을 상기해 보자. 보일의 법칙은 어떤 밀폐 용기의 부피가 작아지면 압력이 커지고, 부피가 커지면 압력이 작아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법칙이다. 이를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보일의 법칙: 압력 X 부피 = 일정


우리 상황에서는 가스의 부피가스등의 부피에서  챔버의 부피로 바뀐다. 따라서 다음의 식이 얻어진다.

           압력_(가스등) X 부피_(가스등) = 압력_(챔버) X 부피_(챔버)     ----- <식 1>


이제 이 식을 변형하면 가스등의 압력을 계산할 수 있다.

            압력_(가스등) = 압력_(챔버) X 부피_(챔버) / 부피_(가스등)


이렇게 보일의 법칙을 이용하여 가스등의 압력을 구하는 식이 아주 간단하게 구해졌다.

이제 실제 값만 넣고 계산하면 된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천재니 뭐니 하면서 떠들썩하게 시작한 서론에 비하면 결론이 너무 싱겁지 않은가? 이 정도로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면 사람들이 왜 불가능하다고 했었을까? 설마 <식 1>도 유도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진 않다. 중1 과정을 성실하게 마쳤고, 여전히 보일의 법칙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식 1>은 누구나 찾아낼 수 있다.




사실은 <식 1>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포기했다.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이다.

왜냐하면 가스등의 부피와 챔버의 부피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 내부의 구조는 아주 복잡해서 산술적으로 부피를 계산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정확하게 부피를 측정할 방법도 없다. 따라서 <식 1>은 무용지물이다.


모든 사람들이 포기하는 이 시점에서 난 좀 더 생각을 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찾아냈다. 이 난제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유형이다. 아이디어의 내용을 알고 나면 별것 아닌데, 그것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글의 서두에서 선배가 내게 '천재' 운운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별거 아니다. 천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방법은 이렇다.

이미 측정을 한번 하면서 구멍이 난 가스등에 일반 대기를 채운 후 밀봉을 한다. 그러면 가스등의 압력은 1 기압일 것이다. 그런 후 이 가스등을 챔버에 넣고 압력을 측정하는 작업을 다시 시도한다.

그러면 새로 얻어지는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1기압_(가스등) X 부피_(가스등) = 압력2_(챔버) X 부피_(챔버)     ----- <식 2>


<식 2>가 <식 1>과 달라진 부분은 가스등의 압력과 챔버의 압력뿐이다. <식 1>에서 가스등의 압력은 미지수로서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값이다. <식 2>에서 가스등의 압력은 1 기압으로서 우리가 아는 값이다. 그리고 <식 1>과 <식 2>에서 챔버의 압력은 우리가 측정하는 값이기 때문에 모두 아는 값이다. 하지만 부피 값들은 여전히 모르는 골칫거리다. 이것들을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이들의 처리 방법이 있다. <식 1>을 <식 2>로 나눠보자. 그러면 절묘하게도 골칫거리였던 부피 변수들이 모두 제거된 후 다음의 식이 얻어진다.

           압력_(가스등) / 1기압 = 압력1_(챔버) / 압력2_(챔버)

여기에서 첫 번째 측정된 챔버의 압력을 '압력1'로 표기했다. 이제 가스등의 압력만 빼고는 모두 아는 값이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가스등의 압력을 구하는 식은 다음과 같다.

압력_(가스등) = 압력1_(챔버) / 압력2_(챔버) X 1기압       ----- <식 3>


이 식의 아름다음이 보이는가? 

<식 3>을 보면, 챔버의 압력을 두 번만 측정하면 이로부터 가스등의 압력을 알아낼 수 있다. 사람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던 부피 변수들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이후 우리는 테스트 패널들을 만들어 이 식이 유효한지 여부를 체크하였다. 결과는 완벽했다.

답이 없다고 했던 문제였는데, 수학적으로 너무도 깔끔하고 완벽한 답을 찾아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었겠는가? 그런데 당시에는 점잔을 빼느라 기쁜 내색을 감추고 있었다. 속으로는 분명 유레카라도 외치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한번 외쳐본다.

"유레카!"




여기서부터는 수학적인 사고라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유용한 가를 간단하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 뭔가 교훈 한 가지라도 넣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작성해 보는 것이다. 특히 어린 자녀가 있는 부모님께는 이 교훈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이들의 사고력 훈련은 이런 수학의 기본 원리를 좇아가며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가스 압력 측정법에 대한 아이디어는 내가 특출하게 머리가 좋아서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가 무슨 기상천외한 것도 아니다. 아주 단순한 사고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초등학교 때 배운 수학의 원리만 알고 있으면 모두가 다 찾아낼 수 있는 아이디어이다.

방정식의 기초 원리를 생각해 보자.
방정식이란 것은 미지수가 포함된 수학식이다.
방정식을 푼다는 말은 이 미지수의 값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미지수가 1개이면 방정식은 몇 개가 필요한가?
1개만 있으면 된다.
미지수가 2개이면 2개의 방정식이 필요하다.
미지수가 3개이면 3개의 방정식이, 미지수가 n개이면 n개의 방정식이 필요하다.


앞의 <식 1>을 살펴보자.

현재 이 식에는 미지수가 몇 개인가?

가스등의 압력, 가스등의 부피, 챔버의 부피가 미지수이다. 총 3개의 미지수가 있다. 따라서 이 식이 풀리려면 이들 미지수가 포함된 식 3개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갖고 있는 식은 단 1개이다. 2개가 더 필요하다. 2개의 식만 더 있으면 우리가 원하던 가스등의 압력을 구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는 2개의 새로운 식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을 했다면 이 이후의 답은 뻔히 보인다. 가스등에 우리가 아는 압력값으로 가스를 채운 후 챔버에 넣어 챔버 압력을 측정하면 새로운 식이 추가로 얻어진다. 난 이러한 사고 과정을 거쳐 <식 2>를 찾아낸 것이다. 어떠한가? 이것은 웬만한 중학생이라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한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끈기이다. 나도 단번에 <식 2>를 찾아낸 것은 아니다. 끈기 있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찾아낸 것이다. 풀릴 때까지 끈기를 갖고 도전하는 것이다.




이전의 회고록들에서 소개했던 난제들은 내가 PDP 사업팀에 기여한 성과가 대단히 큰 것들이라 그 자체로 회고해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반면에 이번 문제는 PDP 사업팀에의 기여도는 매우 낮은 문제였다. 하지만 내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문제는 이번 문제이다. 이 문제는 퍼즐 매니아인 내게 인생 최고의 퍼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고록으로 작성해 보았다.


끝.


2023년 7월 17일 작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