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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다영 Jun 10. 2022

한강에서

  

  가난한 집에서 귀하게 자란 아빠는 엄마가 고생한 덕에 죽는 날까지 가난한 집에서 귀하게 살았다. 걸핏하면 동생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던 아빠였지만, 내게는 한 번도 심부름을 시킨 일이 없었다. 아빠는 유독 내게만 좋은 사람이었다.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날이면 비계를 싫어하던 나를 위해 따로 목살을 사다가 구워 주곤 했다. 크게 썬 김치도 싫어해서 일일이 가위로 잘라 주었고, 생선을 먹을 때면 가시를 발라 밥 위에 얹어 주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최신가요 테이프를 사주었고, 생일에는 책을 선물해주었다. 책의 맨 앞장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담은 편지가 쓰여 있었다.

  아빠는 나를 혼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몇백만 원의 카드 대금을 대신 내 줄 때도, 술을 많이 마시거나 데이트를 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에도, 가출했다 돌아왔던 날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어떤 못된 행동을 해도, 어떤 미운 말을 해도 아빠는 내게 사랑 아닌 다른 것을 준 적이 없었다.

  건설 현장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던 아빠는 어느 날 높은 곳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쳤다. 허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하고 장애 6급을 판정받았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빠는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매일 술을 마셨다. 취해서는 소리도 지르고 욕도 하고 물건도 집어던졌다. 술을 마신 채로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는 바람에 벌금을 크게 물기도 했다.

  그런 아빠를 알코올 중독 치료원에 보낸 건 나였다. 취한 아빠 때문에 제일 많이 울고 힘들었을 사람은 엄마였지만, 엄마는 아빠를 그런 곳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주저하는 엄마를 대신해 나는 치료원을 알아보고 예약을 했다. 아빠는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고, 나는 취한 아빠를 그만 보고 싶었다. 아빠는 큰 저항 없이 순순히 입원했다.

  치료원에서 나온 후로 아빠는 아주 조용히, 조심히 지냈다. 집에서 밥을 하고 청소하고 장을 보는 게 그 시절 아빠의 주된 일과였다. 아빠는 아침과 저녁으로 내 밥을 챙겼다.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밥 먹고 나가라, 밥은 먹었냐 물었다. 그때는 아빠가 저녁밥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아빠가 내게 일찍 들어오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저녁 약속이 생기면 괜스레 미안해지고는 했다. 전화해서 늦게 들어간다고 말하는 게 참 어려웠다. 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지다 언젠가부터는 아빠가 불편해졌다. 왜 너무 미안하면 마주하는 것조차 불편해지고 마는 걸까.

  아빠는 가끔 내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다녀오곤 했다. 아빠의 표정 없는 얼굴과 어두운색 옷들이 내 분홍색 자전거와 참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자전거를 타는 아빠를 보면 오래전 좋아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나는 친할머니댁에, 동생은 외할머니댁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명절이 되면 서울에서 엄마와 아빠가 내려왔다. 아빠는 오자마자 큰아빠의 커다란 짐 자전거를 끌고 나가서는, 옆 동네 외할머니댁에 가서 동생을 데려왔다. 자전거 짐받이에 올라타 아빠를 꼭 붙들고 있던 동생의 귀여운 얼굴과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던 아빠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정말 좋았다. 어쩌면 아빠도 자전거를 타면서 그 시절을 떠올렸을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에 나는 바라나시로 떠났다. 갠지스강을 끼고 걸으면서 아빠를 생각했다. 숙소 근처의 빤데 가트에서부터 화장터가 있는 마니까르니까 가트까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끈적이는 바라나시의 더운 공기처럼 아빠의 삶과 죽음이 내 온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화장터 옆에 앉아 하염없이 강가를 바라보면서 죽은 아빠가 어디쯤 있을까 생각했다. 아빠가 나를 따라 여기에 와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저 어두운 강물과 허옇게 마른 가트의 바닥과 화장터에서 타고 있는 뼈들과 그 연기를, 그 연기가 퍼져가는 붉은 하늘을 나와 함께 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안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아빠가 와 있다면, 아빠를 여기에 두고 가고 싶었다. 나는 결국 돌아가야 할 테지만, 아빠는 여기에 남아 그냥 좀 쉬었으면 했다.


  바라나시에서 돌아온 후로 나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갔다. 엄마와 동생이 출근하고 혼자가 되면 집안을 간단히 치우고 나갈 채비를 했다. 자전거 바구니에 책과 매트와 물병을 싣고, 성산대교와 양화대교와 당산철교와 서강대교와 마포대교를 지나 원효대교 아래에 가 앉았다. 물병에 담아온 소주를 마시며 오래오래 한강을 바라보았다. 깊고 푸르게 찰랑이는 한강에 어둡고 무거운 갠지스강을 겹쳐보며 바라나시를 그리워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살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던 어느 날 밤에는 살아있는 게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혔다. 술 마시던 아빠를 그렇게 미워했는데, 이제 내가 아빠를 대신해 매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빠를 너무 많이 미워한 게 미안해서, 그 말을 이제는 전할 수도 없어서 화가 났다. 그 화가 나를 짓누르고 짓이겼다. 사는 게 너무 슬프고 싫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가슴 속 응어리가 자꾸만 커져서 당장에라도 내 안에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 나는 엉엉 울면서 강변을 달렸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채로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다. 세상이 희부옇게 멀어져 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점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나는 자전거에 앉은 채로 고꾸라졌다. 넘어진 채로 한참을 더 울었다. 크게 소리를 지르고 더 크게 악을 쓰며 울고 또 울었다. 아빠가 앞에 있는 것 같아서,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만 더 서러워졌다.


  그날 넘어져 생긴 상처가 왼쪽 무릎 아래쪽에 남아있다. 피부가 찢어져서 피가 많이 났었다. 이후로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자주 한강에 갔다. 내가 넘어졌던 지점을 지날 때면 그 밤의 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된 후로 그렇게 엉엉 울어본 적이 또 있었던가. 아주아주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울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처럼, 떼를 쓰는 마음으로 울었던 그 밤. 나는 내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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