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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 경 Jul 06. 2020

우리 젊은 사랑의 기억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를 읽고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생각날 때 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사, 2011)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시로 넘어가기 전,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지난 번 읽었던 시에서 나왔던 것처럼 우리 중 누군가는 이 시를 두 시간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거듭해서 읽게 될 것 같기도 하네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모종의 주문처럼 내게 달라붙어 어제부터 이 시를 자꾸 읽게 된다.


 시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두 남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특히 남자를 칭하는 ‘그 젊은이’라는 단어는 시의 주인공이 풋사랑에 마냥 들뜬 어린 소년도, 세월과 함께 여러 사랑을 이미 지나와 사랑에 능숙한 사람도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아마 그 젊은이는 간신히 맺힌 작은 열매처럼 찾아온 ‘그 여자’에게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서툴렀을 것이다. 허리가 아프다는 그녀의 말은 지나가는 말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싶은 마음에, 혹여나 그녀의 말이 사과나무의 꼭대기가 보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자는 그에게 상처가 될까봐 무심코 하는 말처럼 들리고 싶어 속으로 수백 번을 되뇌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로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지나가는 말’이었다며 그 말을 굳이 마음속에 잡아두어 깔지 않을 요까지 장만하고는 서리가 내리고 낙과가 쌓이는 계절이 되도록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여자를 기다린다. ‘물론’ 그 여자가 오는 건 실제 일어난 일일 수도, 젊은이의 꿈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간에 천진하게 지어보이는 웃음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슬프게 부딪힌다. ‘그 젊은이’와 ‘그 여자’가 번갈아 나오던 시는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라는 마지막 연에서 주어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젊은이가 사과나무의 꼭대기를 바라보며 그 여자가 생각날 때마다 울었던 것일 수도, 그 젊은이를 떠난 여자가 사과나무의 꼭대기가 생각날 때마다 그를 떠올리며 울었던 것일 수도, 두 경우 모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을 겪어냈을 그들의 시간을, 그 시간을 보낸 후 결국 한 사람은 천진하게, 다른 한 사람은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그들의 상황을, 그렇게 눈을 마주쳤을 그들의 감정을 상상해본다.


 수업에선 남자가 너무 순진하고 유치하지 않느냐는 의견에 괜히 혼자 흥분해서 구구절절 시에 대한 변호를 늘어놨다. 사실 시에 대한 변호라기보다는 그 시절 나와 그 사람, 그 사람과 나에 대한 변명이었을 것이다. 멋모르던 시절의 사랑은 조금은(어쩌면 많이) 찌질하고, 구질구질하고, 치기 어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사랑도 한 번쯤은 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젊었기에 서툴렀다고, 하지만 진심이었다고 짐짓 변명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시를 읽고선 묻어두었던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 곱씹어보다가 몇 년이나 지난 일들에 아직도 마음을 쓰는 건 이 또한 너무 유치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에 혼자 낯이 뜨거워졌다. 그러다 문득 이 시를 읽고서야 비로소 지나간 사랑에 객관화가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진한 웃음과 난 이제 모두 잊어버렸다는 듯 무심한 시선은 완전히 다른 것 같아 보이지만 그 둘은 실은 생각날 때마다 울었던, 같은 시간에서 비롯함을 이제야 깨닫는다.




* 수업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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