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작가]19.청춘 : 30년 후 자식에게 부칠 편지
안녕? 오늘은 2021년 3월 5일이야. 새해가 한참 지났지만 한국의 3월은 입학과 개학으로 설렘이 가득한 계절이란다. 아침은 아직 쌀쌀하지만 온기 어린 바람만 불어도 호호한 봄을 느끼기에 충분해. 그런데 COVID-19이라는 호흡기성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 이 책 저 책을 읽다가 이메일에 답장을 쓰고 마감일이 다 되어서야 겨우 한 편의 글을 써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지. 과할 정도로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다 보니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아직 만나지 못한 네게 편지를 보낸다. 미래에 있을 펜팔 친구인 네게.
나의 서른은 빛바랜 영수증에서 시작하고 있었어. 문득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가 생각나서 책을 펼쳤더니 반으로 고이 접힌 영수증 하나가 툭 떨어지지 뭐야. 2013년 3월 5일(화) 20:46. 감압지 위에 겨우 달라붙어 있는 희미한 잉크 자국이 고맙더라. 채 기억나지도 않던 시간이 내 나이를 새겨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다시 읽어봤어. 잠시 잊었던 20대가 떠오르더라. 매일매일 실패했던 나날들.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될 수 없는 일 때문에 몹시도 내 자신을 괴롭혔단다. 열패감에 시달리다보니 다정한 위로도 위선으로 느껴지더라고. 몰두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가 고른 책을 읽는 게 전부였지.
한참 책을 읽다가 보니 나만 힘든 게 아니더라. 같은 병을 같이 앓아 주는 문장이 가득하지 않겠니. 어떤 진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해도 괜찮아. 서른을 앞두고 수치심과 열패감, 낙망 따위의 부정적인 단어가 떠올랐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달리 나는 무결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거든. 이게 혹시나 독일어로 말하는 샤덴프로이데(Shadenfreude, 타인의 고통에 느끼는 기쁨)가 아닌가 해서.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묘한 안도감이 들더라고. 괜찮아. 이상한 기쁨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적어도, 남들도 대부분 느끼거든. 겉으로 소리내지 않을 뿐이야.
<삼십세>안에는 7개의 이야기가 담겨있어. 책 제목과도 같은 첫 번째 단편 ‘삼십세’에는 배가본드 운명을 타고난 ‘그’가 취미가 여행인 듯 유럽을 떠돌아다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히치 하이킹으로 차를 얻어 타. 그러다 교통사고를 당해. ‘그’는 살고 잠깐 선의를 베풀었던 기사는 죽었지. ‘오스트리아 어느 도시에서의 청춘’엔 작가 바흐만의 유년이 투영된 고향이 그려져 있어. 세계사를 공부하면 오스트리아 남부 클라겐푸르트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될 거야. 전쟁과 폐허를 마주해야 했던 어린이에게 연민이 느껴지지. 바흐만이 나중에 하이데거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문을 써서 철학자가 되는데 더 깊은 얘기는 나중에 해보자.
‘모든 것’에는 살아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동시에 경험하고 싶지 않은 슬픔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참척이라는 단어를 찾아봐. ‘살인자와 광인의 틈바구니에서’는 전후 10년을 보낸 사람들이 등장해.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공존하는 어느 술집이 배경인데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나이의 증언이 정말 어처구니없게 들린다면 바흐만이 글로 전쟁의 대전제를 어떻게 써부수는(zerschreiben)지 잘 봐둬. 살인자가 사람 하나 죽이지 않고 전쟁터를 전전했다는 증언과 살상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특수한 상황을. 참, 아트 슈피겔만의 마우스는 혹시 읽어 봤니?
‘고모라를 향한 걸음’은 소녀의 구애를 뿌리치지 못한 피아니스트와 소녀의 하룻밤이 그려져 있어. 샤를로테와 마리의 사랑이 네가 사는 미래의 그 곳에선 법으로 인정 받고 있는지 궁금하네. ‘빌더무트라는 이름의 사나이’는 진실을 삶의 신념으로 믿고 있는 판사인데, 자신과 이름이 같은 피고인의 항소심에서 단추 하나의 진실도 모를 수 있다는 한계를 느끼고 그만 감정에 북받쳐 소리를 버럭 질러. 진실을 추적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멀어지는 관념 속에서 괴로워하는 법관의 고뇌를 읽을 수 있어. 글쎄, 이렇게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는 솔직한 법관은 소설에나 있을 거 같아. 헌정 사상 첫 판사 탄핵소추심판이 열린다니 결과가 궁금해. 넌 이미 알고 있겠네. 아 마지막 ‘운디네 가다’는 물의 정령에 대한 이야기야. 바흐만의 운디네는 독백 속에 사랑의 영혼을 가진 채 남자, 한스에 대한 저주와 애착을 녹여냈지. 운디네가 물밑에서 흘리는 눈물은 물가를 걸어가는 자에게 영원히 보이지 않겠지.
바흐만에 대한 정보 없이 이 책을 읽었다면 작가가 여성인 걸 거의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남성 화자가 대부분이라 그래. 법률과 철학을 공부한 시인이라 표현이 좀 난해하지. 작품을 쓸 땐 언어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바흐만은 관용구의 상투적인 표현이 오히려 수수께끼 같다고 그래. 파시즘의 대중 선동에 넌더리가 났겠지. 새로운 인식을 불러오지 못하는 언어 사용은 타락한 사회를 보여준다며. 논리와 철학을 문학으로 끌어와 운문과 산문을 넘나드는 필력은 말해 뭐하겠어.
팬데믹으로 뒤숭숭하지만 일상은 멈추지 않아. 한 달 전 즈음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오스트리아 잘스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미발표곡 헌정 공연을 했어. 바흐만이 오스트리아 태생인 거 알지? 음악을 사랑한 작가답게 쉰베르크(작곡가 윤이상의 스승)와 말러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야. 연인과 주고 받았던 바흐만의 편지는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 2025년에 공개된다네. 백신을 맞고 팬데믹이 종식되면 오스트리아에 가보려고.
서른이 될 네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인생은 이렇다 저렇다 자서전을 쓰고 있더라.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이 책으로 대신할게. 나는 지금이나 미래에도 왠지 마감에 쩔쩔매는 건 매한가지 일 거 같아. 건강하자. 그럼 이만.
잉에보르크 바흐만 <삼십세>를 읽고